도서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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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위한21가지제언

체수유병집-글밭의 이삭줍기

저자 정민
브랜드 김영사
발행일 2019.01.01
정가 13,800원
ISBN 978-89-349-8471-9 04810
판형 140X210 mm
면수 264 쪽
도서상태 판매예정
종이책
전자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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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학자 정민 교수의 다채롭고 풍성한 글밭에서 가려 뽑은 명문 50편

“추수 끝난 들판에서 떨어진 이삭을 줍듯 그동안의 글을 모으고 정리하며 정신을 가다듬는다.”

 

‘다함이 없는 보물’ 같은 한문학 문헌들에 담긴 전통의 가치와 멋을 현대의 언어로 되살려온 우리 시대 대표 고전학자 정민 교수. 고전부터 조선시대 실학자들의 삶과 공부ㆍ차 문화ㆍ꽃과 새 등 다양하고 흥미로운 연구, 군더더기 없는 문장ㆍ멋과 여운이 있는 글쓰기로 정평이 난 그가, 지난 10여 년간의 삶과 연구를 정리하는 산문집 《체수유병집-글밭의 이삭줍기》를 선보인다. 체수(滯穗)는 낙수, 유병(遺秉)은 논바닥에 남은 벼이삭이다. 나락줍기의 뜻이다. 추수 끝난 들판에서 여기저기 떨어진 볏단과 흘린 이삭을 줍듯, 수십 권의 책을 펴내면서 그동안 미처 담지 못하고 아껴두었던 이야기 50편을 모아 한 권으로 엮은 것이다. 기성의 전복이자 일상을 해체하는 독서에 관한 즐거움부터 정민 교수의 큰 스승 연암과 다산 두 지성에 관한 이야기, 질문의 경로를 바꿔야 비소로 열릴 인문학적 통찰에 관한 제언까지. 정민 교수의 다채롭고 풍성한 글밭에서 가려 뽑은 빛나는 사유의 정수를 만난다. 

 

책 속에서

 

차곡차곡 쌓인 순식간이 역사가 된다. 고금은 현재가 포개져서 이루어진 시간이다. 옛날과 지금과 미래는 맞물려 돌아간다. 옛것이 귀한 것은 그때의 지금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오늘을 열심히 살면 후세는 그것을 간직할 만한 옛날이라 부를 것이다. (…) 그간 이런 방식의 작업을 참 많이 했다. 《다산어록청상》과 《성대중 처세어록》, 《죽비소리》, 《한밤중에 잠깨어》, 《오직 독서뿐》 같은 책들은 이면지를 절반 잘라 항목별로 원문을 오려붙여 가방 속에 넣고 다니며 전철에서 주로 해석을 쓰고 평설을 달았다. 집에서는 소파에 앉아 쉴 때나 화장실에 앉아서도 썼다. 해석과 평설이 끝난 종이는 따로 갈무리해두고 새 종이를 그만큼 채워서 늘 가방에 넣고 다녔다. 한동안 잊어버리고 작업하다 보면 어느새 책 한 권 분량이 되어 있곤 했다.

_〈공부하지 않은 날은 살지 않은 것과 같다〉 중에서

 

정조는 늘 50대의 화살에서 마지막 한 대는 쏘지 않은 채 활쏘기를 마쳤다. 왜 쏘지 않았을까? 제왕으로서 겸양의 미덕을 보이기 위해서였다. 마지막 한 대를 아껴, 끝까지 가는 대신 여운으로 남겨둔 것이다. 《서경》에서 “겸손은 더함을 받고, 교만은 덜어냄을 부른다〔謙受益, 滿招損〕”고 한 말이 바로 이 뜻이다. (…) 국왕의 활쏘기 자리는 늘 이렇게 임금과 신하 사이에 백성을 향한 마음을 다지는 다짐으로 끝맺었다. 성대(聖代)의 아름다운 풍경이다. 신하들은 이 광경을 그림으로 그리고 글로 써서 벽에 걸어, 임금이 신하를 아끼는 마음과 이 거룩한 조정에서 임금을 가까이 모시는 영광을 기념했다. 채울 수 있지만 조금 비워둔다. 막판까지 가서 끝장을 보지 않는다. 활쏘기 하나에도 교만을 경계하고 겸손과 아량을 담아, 군신간의 기강을 세우고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나눴다.

_〈정조의 활쏘기〉 중에서

 

고전의 매력에 눈을 뜬 두 번째 계기는 뒤늦게 대학교 4학년 여름에야 찾아왔다. 학과에서 한문특강이 개설되었다. 외부에서 한문 선생님을 모셔와서 여름방학 특강을 했다. 고등학교 때 한시도 줄줄 외우고 했기 때문에 나는 내가 한문을 꽤 잘하는 줄 알았다. 처음 한 주는 서예반 탁본여행 때문에 빠졌다. 그다음 주에야 처음 나갔다. 첫 줄 가운데 자리에 앉았다. 당시 한문강의를 맡으셨던 이기석 선생님은 《맹자》 강의를 하고 계셨다. 구절마다 소리를 내서 읽게 하고는 하나하나 짚어가며 해석을 시키셨다. 선생님께서 물어보셨지만 막상 하나도 대답하지 못했다. 자존심이 너무 상했다. 그때부터 선생님을 모시고 본격적으로 한문공부를 시작했다. 대학원에 진학하면서는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자연스레 고전문학 전공을 선택했다.

_〈변치 않으려면 변해야 한다〉 중에서

 

고전은 콘텐츠의 보고다. 있을 것은 다 있다. 찾는 것은 무엇이든 있다. 논술지침서가 필요한가? 이 나라 조선은 500년간 논술 시험으로 인재를 뽑은 나라다. 사대부의 그 많은 문집 속에 글쓰기의 이론은 차고도 넘친다. 눈높이만 맞추면 지금도 당당히 경쟁력을 갖춘 콘텐츠가 된다. 독서교육이 궁금한가? 독서론을 표제로 내건 글을 다 꼽을 수가 없다. 현대어로 바꿔서 정리하면 서구의 어떤 독서이론보다 훌륭하다. (…) 상황은 늘 바뀐다. 사람들의 취향도 계속 흘러간다. 어제는 좋아했는데, 오늘은 거들떠도 안 본다. 오늘의 열광은 내일까지 가지 않는다. 사람들의 기호는 잠깐 사이에 변한다. 오늘 남이 그 장사로 돈 번다고 내가 뛰어들면 그때부터는 돈을 못 번다. 고전의 콘텐츠가 아무리 훌륭해도 임기응변하고 응변작제하는 안목이 없이는 안 된다.

_〈우리 고전의 광맥에서 비전을 찾다〉 중에서

 

내면의 목소리에 깊이 귀를 기울여라. 목표는 달성되는 순간 사라진다. 새 목표를 잘 세워야 삶은 제 길을 찾고, 과정은 차례를 얻는다. 그러지 않으면 열심히 할수록 일은 더 꼬인다. 그대들에게 허락된 모든 것을 한껏 즐겨라. 더 깊이 고민하고, 참담하게 좌절하라. 소아(小我)의 각질을 깨고 ‘참 나’로 우뚝 설 때까지. 주체를 세우려면 더 많은 책을 읽어라. 더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라. 여가는 그저 생기지 않는다. 여유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만들어나가야 한다. 옛사람은 ‘독만권서(讀萬卷書), 행만리로(行萬里路)’, 즉 만 권의 책을 읽고 만 리의 길을 여행하는 속에 인생의 대답이 들어 있다고 했다. 그 과정에서 삶의 눈길은 깊어지고, 마음속에는 호연한 기운이 쌓인다.

_〈대학 문에 들어선 젊은 벗들에게〉 중에서

 

  • 정민 (저자)

충북 영동 출생. 한양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모교 국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물질의 삶은 진보했지만 내면의 삶은 더 황폐해진 시대에 등불이 되는 말씀과 세상의 시비 가늠을 네 글자의 행간에 오롯이 담아 묶었다.

 

그동안 연암 박지원의 산문을 꼼꼼히 읽어 『비슷한 것은 가짜다』와 『고전 문장론과 연암 박지원』을 펴냈다. 18세기 지식인에 관한 연구로는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발견』과 『다산선생 지식경영법』『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문예공화국』『미쳐야 미친다』『삶을 바꾼 만남』 등이 있다. 또 청언소품淸言小品에 관심을 가져 『일침』『마음을 비우는 지혜』『내가 사랑하는 삶』『한서 이불과 논어 병풍』『돌 위에 새긴 생각』『다산어록청상』『성대중 처세어록』『죽비소리』 등을 펴냈다. 이 밖에 옛 글 속 선인들의 내면을 그린 『책 읽는 소리』『스승의 옥편』 등의 수필집과 한시 속 신선 세계의 환상을 분석한 『초월의 상상』, 문학과 회화 속에 표상된 새의 의미를 찾아 『한시 속의 새, 그림 속의 새』, 조선 후기 차 문화의 모든 것을 담아서 『새로 쓰는 조선의 차 문화』 등을 썼다. 아울러 한시의 아름다움을 탐구한 『한시 미학 산책』과 『우리 한시 삼백수』, 사계절에 담긴 한시의 시정을 정리한 『꽃들의 웃음판』을 펴냈고 어린이들을 위한 한시 입문서 『정민 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 이야기』도 썼다.

 목차

 

서문

 

제1부 문화의 안목

 

섬광처럼 번쩍하는 순간

공부하지 않은 날은 살지 않은 것과 같다

문화의 차이와 비유의 차이

슬픈 꿈

문화의 리듬

영어공부

소소한 큰 가르침

사실과 진실의 사이

타이중의 차관

빛 없는 그늘

스스로를 아끼는 사람

소르본대학 교정에서 만난 우리 고전

 

제2부 연암과 다산

 

연암, 금기를 뛰어넘는 문체의 불온성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

《열하일기》의 인문정신

다산의 지식경영, 생각이 경쟁력이다

다산의 제자 교육법

최고의 메모광 다산 정약용

다산에게 묻는 지식경영의 비결

쉼 없이는 열정도 없다

 

제3부 옛 뜻 새 정

 

새벽 스님

복장 속 고려 인삼

호변

기양

장광설

습용관

오리상공

살풍경

수경신

국화 노인

발합고금

수이강

정조의 활쏘기

조조의 가짜 무덤

문두루 비법

호질

호곡장

독서성

표선문정

여송표인

절대가난

박면교거

성어 6제

최고의 문화 콘텐츠 《동의보감》

 

제4부 맥락을 찾아서

 

질문의 경로를 바꿔라

논문 작성과 텍스트 분석

변치 않으려면 변해야 한다

우리 고전의 광맥에서 비전을 찾다

 

부록

대학 문에 들어선 젊은 벗들에게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출판사 리뷰

 

 

섬광 같은 사유, 내면 깊은 성찰, 고전학자 정민 교수 산문집

 

“추수 끝난 들판에서 떨어진 이삭을 줍듯

그동안의 글을 모으고 정리하며 정신을 가다듬는다.”

 

‘다함이 없는 보물’ 같은 한문학 문헌들에 담긴 전통의 가치와 멋을 현대의 언어로 되살려온 고전학자 정민 교수. “옛것을 그대로 따라 해서도 안 되고, 옛것과 완전히 달라서도 안 된다”는 ‘상동구이(尙同求異)’의 지론으로 방대한 자료를 분류해 난해와 고리타분함을 지워내고 다양한 주제로 변주하여 대중과 소통해온 우리 시대 대표 학자이다. 고전부터 조선시대 실학자들의 삶과 공부ㆍ차 문화ㆍ꽃과 새 등의 다양하고 흥미로운 연구와, 군더더기 없는 문장ㆍ멋과 여운이 있는 글쓰기로 정평이 나 있는 그가, 지난 10여 년간의 삶과 연구를 정리하는 산문집을 선보인다. ‘정민 산문집 1권’ 《체수유병집-글밭의 이삭줍기》이다.

체수(滯穗)는 낙수요, 유병(遺秉)은 논바닥에 남은 벼이삭이다. 나락줍기의 뜻이다. 책 제목 ‘체수유병집’은 이 구절에서 따왔다. 추수 끝난 들판에서 여기저기 떨어진 볏단과 흘린 이삭을 줍듯, 수십 권의 책을 펴내면서 그동안 미처 담지 못하고 아껴두었던 이야기 50편을 모아 한 권으로 엮은 것이다.

이 책은 정민 교수가 보낸 지난 시간들에 관한 살아 있는 증언이다. “한 편의 글마다 그 시절의 표정과 한때의 생각이 담겨 있다”는 저자의 말처럼, 학자로서의 연구와 경험, 철학 등 다양한 삶의 흔적들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기성의 전복이자 일상을 해체하는 독서에 관한 즐거움부터 정민 교수의 큰 스승 연암과 다산 두 지성에 관한 이야기, 질문의 경로를 바꿔야 비소로 열릴 인문학적 통찰에 관한 제언까지. 정민 교수의 다채롭고 풍성한 글밭에서 가려 뽑은 빛나는 사유의 정수를 만날 수 있다.

 

 

삶과 문화에 대한 단상부터 옛일로 지금을 비춰본 옛 뜻 새 정,

인문학의 쓸모와 공부법, 연암과 다산의 시대를 압도한 사유의 힘을 만난다

 

이 책은 글의 성격에 따라 4부로 나눴다. 제1부 ‘문화의 안목’은 삶의 단상과 문화에 대한 생각을 적었다. 제2부 ‘연암과 다산’은 정민 교수가 사랑한 두 지성 박지원과 정약용에 대해 쓴 글이다. 제3부 ‘옛 뜻 새 정’은 옛일로 지금을 비춰본 짧은 글 모음이며, 제4부 ‘맥락을 찾아서’는 변화의 시대, 인문학의 쓸모와 공부의 방법에 대해 다룬다. 마지막 부록은 이제 막 대학 문에 들어선 신입생들에게 전하는 따뜻하면서도 촌철살인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제1부에서는 그동안 주로 옛사람의 독서법을 소개해왔던 저자가 이번에는 자신의 독서법, 온몸으로 체험한 독서의 즐거움을 오롯이 보여준다. 그에게 독서란 단순한 지식을 구하는 일이 아니다. 질문을 바꿔 대수롭지 않은 것들을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으로 만들고, 새로운 저작의 착상도 얻는다. 남들이 보면서도 못 보는 것들을 보고, 그것들이 삶으로 들어와 더 툭 트인 사람이 되는 것, 기성의 전복ㆍ일상의 해체, 그것이 독서의 지침이자 목표다.

 

남의 책을 읽다 말고 내 책을 떠올리고, 이 생각을 하다가 저 궁리와 만나는 일이 내 독서의 가장 큰 즐거움이다. 결과는 완전히 다르지만 착상과 알맹이는 온전히 거기서 나왔다. 분야가 다르고 문화가 다를수록 경이의 폭은 더 커진다. 왜 진작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맨날 거기서 거기인 말 바꾸기가 갑자기 견딜 수 없어진다. 이럴 때 독서는 기성의 전복이요 일상의 해체다. 섬광처럼 번쩍하는 순간에 모든 것이 달라진다. 세상에 독서 말고 다른 어떤 것이 이런 깨달음을 주겠는가?

책만 책이 아니다. 독서는 문자를 빠져나와 세상이라는 텍스트를 읽을 때 가장 위력적이다. 삶의 행간을 읽고, 드러나지 않는 질서를 읽을 때 독서는 비로소 완성의 단계에 진입한다. 남들이 같이 보면서도 못 보는 것들이 내게 보이기 시작한다. 어제까지 아무 의미도 없던 것들이 내 삶 속으로 걸어들어와 간섭하기 시작한다. 수많은 독서는 사실 이 단계에 진입하기 위한 연습 과정일 뿐이다.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생각해서, 더 툭 트인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 내 평생 독서의 지침이요 목표다. _〈섬광처럼 번쩍하는 순간〉 중에서

 

제2부에는 사유의 힘으로 사람을 압도하는 연암 박지원, 방법의 사유로 문제를 풀어주는 다산 정약용의 일화로 가득하다.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에 숨겨진 인문정신과 금기를 뛰어넘는 연암 특유의 문체적 불온성에 대한 해설, 최고의 메모광 다산의 제자 교육법과 그만의 휴식ㆍ재충전 방법 등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연암의 문체는 불온하다. 그는 누구나 당연한 것으로 믿던 가치를 거부했다. 그는 거꾸로 보고, 뒤집어 보고, 바꾸어 보았다. 듣고 나면 당연하고 생각해보면 지당한데, 그 이전에는 아무도 그런 말을 안 했다. 그래서 늘 시대의 금기를 건드렸다. 누구나 알면서도 입 다물고 싶어 하던 생각을 그는 서슴없이 말했다. 연암이 글을 한 편 발표할 때마다 당시의 젊은 문사들이 술렁거렸다. 그 생각의 진취성에 움찔했고, 발상의 참신함에 열광했다. 그들은 환호하며 연암을 뒤따랐다. 그 말투를 흉내 내고, 생각에 동조했다.

정조는 그의 문체가 지닌 불온성을 진작에 간파했다. 그래서 그가 빼든 카드가 ‘문체반정(文體反正)’이다. 문체를 바르게 되돌려놓음으로써 지식인의 기강을 바로잡겠다는 것이었다. 과연 동서고금 어떤 임금이 문체를 카드로 내세워 사회 기강을 확립하겠다고 나선 경우가 있었던가? 이 듣도 보도 못한 사태의 중심에 연암이 있었다. 한 사람의 문체가 지닌 파괴력이 이토록 의미심장했던 예를 달리 찾기가 어렵다. _〈연암, 금기를 뛰어넘는 문체의 불온성〉 중에서

 

메모의 위력을 가장 잘 알았고 효과적으로 활용한 사람은 다산 정약용이다. 그는 가히 조선 최고의 메모광이라 할 만하다. 틈만 나면 적었고, 떠오르는 대로 기록했다.

젊어서 정조에게 《시경》에 대한 강의를 들을 때 일이다. 정조는 날마다 엄청난 양의 숙제를 내줬다. 남들이 다 쩔쩔맬 때, 다산만 혼자 척척 해냈다. 그 비결은 평소의 메모 습관에 있었다. 그는 보통 때 주제별 공책을 만들어놓고 필요한 내용을 메모하곤 했다. 임금이 어떤 질문을 던져도 공책 속에 답이 다 들어 있었다. 다른 사람과는 애초에 경쟁이 되질 않았다. 시험을 볼 때마다 그는 1등을 독차지했다. 그는 뒤에 정조가 낸 700개가 넘는 작은 질문과 자신의 대답을 묶어 《시경강의(詩經講義)》라는 책을 엮었다. 이 책을 읽으면 당시 공부의 광경이 생생하게 되살아날 뿐 아니라, 다산의 폭넓은 섭렵에 다시 한번 놀라게 된다. 그런데 그때 함께 공부한 여러 신하들 중에 다산처럼 기록으로 남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_〈최고의 메모광 다산 정약용〉 중에서

 

제3부에서는 ‘장광설’, ‘습용관’, ‘호질’, ‘여표송인’ 등 옛 뜻에 담긴 다양한 이야기를 현대적 관점에서 풀어낸다. 그중 기양(技?)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기양은 가려움증이다. 일종의 표현욕으로 아주 강렬한 욕구를 말한다. “저것도 솜씨라고, 아이고 답답해라. 내 솜씨를 한번 보여줘?” 얕은 재주로 자신을 뽐내기에 바쁜 현대인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형가(荊軻)가 진시황 암살에 실패한 후 친구였던 악사 고점리(高漸離)는 신분을 감추고 진나라로 가서 고용살이를 했다. 몇 년을 고생스레 일했다. 어느 날 주인집에 온 손님이 축(筑)을 연주했다. 솜씨가 형편없었다. 고점리는 기양을 못 이겨 저도 몰래 그 연주에 대해 평을 했다. 다른 하인이 주인에게 고하자, 주인이 그를 불러 축을 연주하게 했다. 그는 간직해둔 악사의 정복을 입고 나가 놀라운 연주를 선보였다. 그날로 그는 일약 스타가 되었다. 마침내 진시황의 악사가 되어 궁중에 들어갔다. 형가를 이어 황제 곁에서 악기를 연주하다가 그것으로 황제를 격살하려다 미수에 그쳐 참혹한 죽음을 당했다.

《안씨가훈(顔氏家訓)》에서는 고점리의 이야기를 소개한 후 “기양은 재주를 품어 속이 근질근질한 것이다”라고 풀이했다. 기양은 참을 수 없는 가려움증이다. 표현하지 않고는 내가 도저히 살 수가 없다. 한바탕 시원하게 풀어놓아야 숨도 제대로 쉬어지고, 비로소 살아 있음을 느낀다. 이런 갈증 하나 없이 공장에서 물건 찍어내듯 하는 얕은 재주와 허튼 재간만 세상에 넘쳐난다. _〈기양〉 중에서

 

제4부에서는 변화의 시대에 맞춰 우리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우리에게 옛것 혹은 고전이란 어떤 의미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에 관한 정민 교수의 탁견이 담겨 있다. 더불어 저자가 고등학교 한문시간에 고전의 매력을 깨닫고 고전학자가 되기까지의 과정뿐만 아니라, 텍스트 분석의 중요성과 그 절차도 엿볼 수 있다.

 

고전을 공부하는 일은 옛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일이다. 이미 흙으로 돌아간 옛사람을 글을 통해 만나 살아 숨 쉬는 그들의 호흡을 느끼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고전은 시간 속에서도 그 가치가 조금도 바래지 않는다. 나날이 새롭고 언제나 새롭다. 고전을 통해 우리는 시간과 공간적 제약을 뛰어넘어 과거와 직접 소통한다.

시간은 흘러가고 삶의 양태는 끊임없이 변한다. 이때 옛날이란 고정불변의 가치가 아니다. 옛사람은 남을 따라 하지 않고 자기만의 목소리를 내서 고전이 되었다. 지금 내가 그들의 자취를 제대로 배우는 길은 그들을 그대로 흉내 내지 않고,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나만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그래야 훗날 사람들이 내가 한 것을 두고 고전이라고 부를 것이다. 변치 않는 옛날이 되려면 변해야 한다. 그 변화 속에서 변치 않는 삶의 본질을 꿰뚫는 지혜가 샘솟아난다. _〈변치 않으려면 변해야 한다〉 중에서

 

 

* * *

다산은 보름에 한 번은 책상을 정리하라고 했고, 연암은 젊은 날에 쓴 메모 쪽지를 냇물에 흘려 지웠다. 하루하루 바쁘게 내달리는 것도 좋지만, 한 번씩 치우고 버리고 정돈해야 정신이 든다. 그래야 나를 잃지 않는다. 송년회다 망년회다 지난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는 방법에는 저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추수 끝난 들판에서 떨어진 이삭을 줍는 마음으로 그동안의 시간을 정리하며 정신을 새롭게 가다듬는 것은 어떨까? 그것이 ‘체수유병’ 네 글자가 지금의 우리에게 전하는 진정한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