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으로 추락하는 이들을 위한 신학
저자 |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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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 손성현 |
감수 | 김진혁 |
브랜드 | 포이에마 |
발행일 | 2018.10.30 |
정가 | 12,800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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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9-11-5809-081-4 03230 |
판형 | 127X190 mm |
면수 | 188 쪽 |
도서상태 | 판매중 |
칼 바르트의 《로마서》가 탄생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책, 러시아 대문호의 문학과 신학이 하나로 융해되는 거대한 용광로, 고통과 용서와 희망의 변증법을 치열한 언어로 짚어낸 현대신학의 고전.
1921년 스위스의 목회신학자 투르나이젠은 신과 인간의 경계를 지우려는 신학이 야기한 위기를 극복할 가능성을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속에서 찾았다. 이 저작은 당시 독일어권 신학에서 아직 낯선 이름이었던 도스토옙스키를 발견케 했으며, 칼 바르트의 《로마서》가 타오르게 하는 불쏘시개가 되었다. 이 책의 메시지는 《로마서》 제2판의 중요한 갈피마다 고스란히 남아 있으며, 또한 《로마서》의 방대한 사유와 해석이 이 얇은 책에 오롯이 담겨 있다.
인간의 종교심·문화·역사·윤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으로부터 시작하는 신학, 죄와 용서의 긴장을 잃지 않는 신학을 통해 지옥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진실된 위로를 전하며 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커다란 울림을 전한다. 도스토옙스키를 읽었던 독자라면 깊이 있는 신학적 관점에서 작품을 재해석하는 재미를 느낄 것이고, 소설을 읽지 않았던 독자라면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핵심부터 맛보게 될 것이다.
책 속에서
도스토옙스키가 그려낸 인물들은 하나같이 질문을 던지는 존재로 묘사된다. 그들은 모두 자기 자신 너머의 어떤 것을 가리키는 존재다. 폭풍우처럼 몰아치는 격정 속에서, 난마처럼 뒤엉킨 생각 속에서, 치열한 대화 속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이 거대한 것, 멀고도 가까운 것, 죽음 너머에 있지만 죽음 이편에 있는 그것에 사로잡힌 존재다. 하지만 이 점에서 그들은—본인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바로 그것을 전하는 존재다. 또한 목숨을 걸고 그것을 증언하는 사람이며, 그것에 사로잡힌 채 그것을 가리켜 보이는 존재다. 그들은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있으나 스스로 답을 준다. 스스로 찾아 헤매고 있으나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아 헤맨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위대한 것을 지시하고 암시하면서, 바로 그것이 현존한다는 사실의 증거이자 표징이 된다. _68~69쪽
우리는 그런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은 것이다. 너무나 비현실적이고 극단적인 인물들, 언제라도 하늘로 솟구치거나 지옥으로 추락하는 존재들, 허황된 형이상학적 고민에 사로잡혀 휘청거리며 괴로워하는 인간들과 우리는 완전히 다르다고 믿고 싶은 것이다. … 어쩌면 바로 그 양극성이야말로 도스토옙스키 인간관의 총체적인 의미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려 섞인 눈빛으로 도스토옙스키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그의 작품에서 드러난 비인간적이고 탈속적인 특성 때문에 싫어하기도 하지만, 너무나도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특성 때문에 싫어하기도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 둘이 동전의 양면과 같기 때문이다. _70~71쪽
미시킨 공작은 왜 백치 취급을 받는가? 우리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세계관과 인생관, 인간의 모든 지혜라는 것이 결국에는 하나님에 대한 질문을 (질문으로써!) 회피하려는 시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백치는 그 질문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한다. 이것이야말로 백치의 신적인 어리석음이다. _83쪽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겠어? 그건 나에게는 가당치도 않은 일이야. 나는 고작해야 이 세상의 유클리드적인 지성을 가진 거야. 어떻게 인간이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에 대해 판단을 내릴 수 있겠어?” 이것이 무신론자 이반의 질문이다. 참된 하나님에 대해 무언가 말한다고 할 때, 이 무신론자의 질문보다 강력하고 진실한 말이 가능할까? … 이러한 무신론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러한 무신론이 공격하고 있는 것은 오히려 (두 번째 시험에 넘어가 버린) 교회다. 손가락으로 하나님을 가리키고는 있으되 인생의 불가사의함에 대한 질문을 잠재워 버리는 교회다. 그 불가사의함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음으로써 하나님을 증언한다. 이반과 같은 무신론자는 열정적으로 거짓 신을 부정하는데, 이로써 참된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그는 하나님과 그분의 영원한 세계가 인간의 유한한 생각으로 인해 “유클리드적인 지성, 이 세상의 지성”으로 파악 가능한 신으로 전락하는 것에 저항한다. 그런 신은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인생의 불가사의함을 풀어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증거물 혹은 얄팍한 위안에 불과하다. 인간은 스스로를 속여가면서 그 불가사의함을 외면하려고 한다. _108~109쪽
톨스토이의 경우 이런 장면은 거의 대부분 인간이 새로운 인생으로 진입하는 데 필요한 마지막 단계로, 종교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최고의 위업이 달성되는 곳이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는 다르다. 치열한 몸부림은 있다. 하지만 지나치게 안간힘을 쓰지는 않는다. “회심”이라 부를 만한 일이 일어나기는 하지만 아주 자유롭고 세상적이고 긍정적인 방식으로 일어난다. 이는 복음서에 나오는 세리와 죄인의 “회심”을 떠올리게 한다. 반면 톨스토이의 작품에서는 필연적으로 경건주의적인 참회의 노력을 떠올리게 된다.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에도 그런 결단과 전환의 순간이 있지만 그것이 회심자와 비회심자의 구분, 의로운 사람과 불의한 사람의 구분, 하나님의 자녀와 세상의 자녀로의 구분으로 귀결되지는 않는다. _145~146쪽
그 변화는 어디에서도 목적이나 의도대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을 원하거나 요구할 수도 없다. 그저 길가에 피어 있는 꽃처럼 가만히 서 있다. 게다가 그 길은 특별한 성인이 걸어가는 길이 아니다. 애쓰며 노력하는 사람의 길도 아니다. 누가 봐도 이 세상의 자녀인 이들, 심지어 죄인과 창녀와 살인자, 불안하고 절망적인 사람들이 걸어가는 길 언저리에서 피어난다. 용서의 나라로 인도하는 길은 의인의 길이 아니라 죄인의 길이기 때문이다. _147~148쪽
우리는 도스토옙스키의 결백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의 사상에서 이렇듯 엄청나게 돌출되어 있는 비정상적인 모습도 고스란히 그의 것이다. 우리가 인정하고 싶은 것은, 도스토옙스키 스스로가 모든 인간 안에 있는 반항적인 요소를 아주 많이 지닌 채로 살았으며 그것을 그토록 탁월하게 드러내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도스토옙스키 본인이 자신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문제적 인물 가운데 하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성자가 아니다. 금욕주의자도 아니다. 고상한 사람도 아니고 오히려 악마적인 영혼이다. 그는 톨스토이가 아니다. 도스토옙스키다. 그는 이 세상의 이름을 가지고 있고 이 세상의 얼굴을 하고 있다. 그는 인간으로서 우리 앞에 서 있다. 그 역시 자신의 인간성을 통한 굴절 속에서만, 오로지 간접적인 방식으로만 우리의 도스토옙스키이다._155~156쪽
결국 모두의 논문과 무관하지만, 또 동시에 모두에게 도움이 될 만한 투르나이젠의 《도스토옙스키》를 읽기로 했다. 박사과정생의 고된 일상에 부담이 되지 않는 얇은 분량이 모두의 동의를 끌어내는 데 무엇보다도 크게 기여했다. 그런데 별로 기대하지 않고 시작된 책 읽기 모임이 진행될수록 모두가 점점 투르나이젠에게 설득되어갔다. 결국 모임을 마무리할 때, 한 친구가 무릎을 탁 치며 “그래, 이게 바로 신학이지!”라고 외쳤다. 정교하고 치밀한 학술적 신학에 지치고 불안한 미래 때문에 중압감에 눌려 있던 젊은 신학도들에게 이 책은 신학이 무엇이고 신학은 어떻게 하는지에 대한 감각을 다시 일깨워줬다. _183~184쪽, 해제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