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발 하라리에게 묻다. <호모 데우스> 10문 10답
유발 하라리에게 묻다. <호모 데우스> 10문 10답
2017.07.31
유발 하라리에게 묻다. <호모 데우스> 10문 10답
① Q : 과학은 상당부분 인간의 능력이나 기능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기능적 의미에서 인간을 대신할 수 있는 과학기술은 차고 넘친다는 뜻이겠습니다. 우리 인간은 더 이상 우리의 기능이나 능력으로 우리를 증명할 수 없는 것은 아닌지요? 미래에 인간의 정체성은 무엇으로 정의하게 될까요? (godf**** 님의 질문)
A: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일단 AI가 정치, 경제, 심지어 로맨스에서도 우리보다 더 나은 결정을 하게 된다면, 인간성이나 삶에 대한 우리의 개념이 바뀌게 되겠죠. 우리 인간은 삶을 의사결정의 드라마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민주주의와 자유시장 자본주의는 개인을 세상에 관해 여러 가지 선택을 하는 합리적인 존재로 봅니다.
셰익스피어 연극이나 할리우드 코미디 같은 예술작품도 어떤 특별하고 중요한 결정을 하는 주인공들을 다루곤 하죠. ‘살 것이냐, 죽을 것이냐?’ ‘X남자, 아니면 Y남자랑 결혼해야 하나?’와 같은 결정들이죠.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둘 다 유사하게 올바른 선택 여부에 따라 영원한 구원 혹은 천벌을 받는다는 주장을 내세우는 의사결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의사결정을 하는 데 우리가 점차 AI에 의존하게 된다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삶을 이해하게 될까요? 현재 우리는 아마존에 의존하여 책을 고르고, 구글 지도로 교차로에서 오른쪽으로 갈지, 왼쪽으로 갈지를 선택합니다. 하지만 충분한 데이터와 계산능력이 갖추어진다면, 곧 우리는 뭘 공부할지, 어떤 직업을 택할지, 누구와 결혼할지를 결정하는데 AI에 의존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살면서 인간이 의사결정을 내릴 일은 없게 될 것입니다. 민주주의와 자유시장 자본주의는 거의 의미를 잃게 되겠지요. 대부분의 종교와 예술작품도 마찬가지 운명이 되겠군요. 구글 알고리즘에 의해 중요한 모든 결정이 이루어지는 셰익스피어 연극을 상상해보세요. 햄릿은 아주 편안한 삶을 누리게 될 테지만 과연 그게 의미 있는 삶일까요? 사람들이 외부 알고리즘에 의사결정을 맡기게 되면 삶은 과연 어떤 모습이 될까요? 그러한 삶이 의미가 있다고 칭할 수 있는 모델이 있나요? 현재로선, "없다"입니다.
② Q: 작가님의 책은 흥미로운 전개가 펼쳐지는 영화 속 타임루프처럼 생동감 있고, 저자의 다양한 학문적 소양이 여실히 느껴집니다. 사전 작업을 포함해, 작가님이 글을 쓰는 모든 과정이 궁금합니다. (간석영 님의 질문)
A: 글 쓰는 과정에서 저는 저의 답보다는 질문에 초점을 맞춥니다. 커다란 질문으로 시작하여, 그것이 역사든, 생물학, 경제학, 혹은 심리학이든 그 질문이 저를 이끄는 대로 따라갑니다. 그 질문에 초점을 유지하는 한 다른 길로 빠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질문으로 시작은 하지만 곧바로 자신만의 이론을 개발하여 자신이 물었던 질문보다는 자신의 이론을 방어하는데 더 주의를 기울이게 됩니다. 다른 여러 분야에 전문가가 되기는 매우 어렵기 때문에, 자신의 이론을 방어하려면 통상 자신이 가장 잘 아는 한 분야에만 집중합니다. 처음 질문을 잃어버리고 자신의 이론에만 초점을 맞출수록 자신의 무지를 수긍하기가 매우 어려워집니다. 자신의 무지를 수긍하면 명확성이 배가됩니다. 어떤 것을 모르는 경우, 그냥 모른다고 말하세요. 자신의 무지를 덮기 위해 구차한 설명을 시작하지 마세요.
특별한 예를 들어보기로 하죠. 제가 역사에 관해 흥미를 느끼는 커다란 질문 중 하나는 대부분의 인간사회에서 왜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고 있느냐입니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저는 역사뿐만 아니라, 심리학, 인류학, 생물학, 동물학에 관한 많은 서적과 논문을 읽었습니다. 침팬지와 다른 동물들의 수컷과 암컷 간의 관계를 비교함으로써 남성과 여성 간의 관계에 관하여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가장 보편적인 이론은 남성이 신체적으로 여성보다 강하므로 완력을 사용하여 여성을 제압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 이론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사회에서 권력은 신체적인 힘보다는 사회적 기술에 더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들과 어떻게 타협하고 혹은 조종할지를 이해하는 것이 사회적 우월성 획득의 진정한 핵심입니다.
어떻게 미국 대통령이나 중국 공산당 총서기가 될 수 있을까요? 다른 후보자 모두를 두들겨 패서 되는 것은 아니지요. 오히려, 지지자들의 강한 동맹을 구축함으로써 가능해집니다. 이와 유사하게, 20대들이 연장자들보다 훨씬 신체적으로 강하지만 대부분의 인간사회에서 60대들이 20대들을 지배합니다. 조직범죄 단체에서조차도 두목이 반드시 신체적으로 가장 강한 남성은 아닙니다. 두목은 흔히 자신의 주먹은 거의 쓰지 않는 나이 지긋한 남성입니다. 그는 더러운 일을 하기에 더 적합하고 젊은 이를 대신 내세웁니다. 따라서 완력으로 남성의 지배를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남성이 여성을 지배해 온 이유를 언급하는 또 다른 일반적인 이론에서는 여성이 임신을 하거나 어린 아이들을 돌볼 때 많은 도움이 필요한 반면, 남성은 지도자 역할을 맡기 위한 공격적인 경쟁에만 몰두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코끼리 같은 동물들은 서로 의지하는 특성을 지닌 암컷과 서로 경쟁하는 수컷 간의 역동성이 모계사회를 초래하였습니다. 암컷 코끼리는 어린 새끼들을 기르는데 많은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에 사회적 기술을 개발하고 어떻게 협력하고 요구를 들어줘야 하는지를 익혀야 합니다. 이들은 자신의 새끼를 키우는데 도움이 되는, 암컷으로만 구성된 사회망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반면, 수컷은 싸움과 경쟁에만 자신의 시간을 사용합니다. 수컷의 사회적 기술과 유대는 제대로 개발되지 않고 있는 것이죠. 따라서 코끼리 사회는 협력적인 암컷들의 강한 네트워크에 의해 지배되며 자기중심적이고 비협조적인 수컷들은 한쪽으로 밀려나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이 코끼리에게서 가능하다면, 왜 호모 사피엔스에게서는 그렇지 않을까요? 암컷 코끼리와 마찬가지로, 인간 여성들에게도 아이들을 기르는 데 필요한 도움을 얻기 위한 사회적 기술 개발이 필요하며, 끊임없이 자신의 아이의 관점에서 현실을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이 요구됩니다. 따라서 여성이 남성보다 더 나은 사회적 기술을 지니고 있고 다른 사람의 요구사항, 욕구, 관점을 더 잘 이해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성이 자신들끼리 협력하기 위해 그들의 우월한 사회적 기술을 활용하여, 공격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남성들을 책략으로 누르고 조종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현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협력이 성공의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 종(種)에서, 덜 협력적으로 여겨지는 개체(남성)가 보다 협력적으로 여겨지는 개체(여성)를 지배함은 왜 일까요? 그건 저도 모릅니다. 어떤 기발한 설명을 둘러대는 대신, 그저 저의 무지를 기꺼이 인정하겠습니다. 그게 저의 사고의 명확성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니까요.
③ Q: 만약 모두가 동등한 수명과 환경과 능력을 가지게 된다면 사람은 그래도 경쟁을 할까요? (김빛나 님의 질문)
A: 모든 사람이 똑같은 수명, 환경, 능력을 가지게 될 가능성은 매우 낮습니다. 어떤 새로운 기술이 매우 저렴하여 모든 사람이 그 것을 보유하게 되면, 그 능력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다른 어떤 분야에서 서로 경쟁을 하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새로운 생명공학이 인류를 생물학적 카스트 제도로 갈라놓을 심각한 위험이 존재합니다. 생명공학이 발달함에 따라, 인간의 수명이 연장되고 인간의 능력이 향상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지만, 새롭고 경이로운 치료법이 비쌀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수십억 명의 모든 사람들이 다 사용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고로 역사상 처음으로, 경제적 불평등이 생물학적 불평등으로 정의될 수 있을 것입니다. 더불어, 상류계급은 나머지 사람들보다 더 부유할 뿐만 아니라, 훨씬 더 오래 살고, 엄청 더 많은 재능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④ Q: 현재 4차 산업혁명으로 넘어왔는데 더 나아가 5차 산업혁명은 어떤 것이 핵심이라고 보시나요? (이사화 님의 질문)
A: 저는 그 핵심이 정보기술과 생명공학의 합병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의 과학적 학설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유기체는 알고리즘이며, 충분한 바이오인식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함으로써 인간을 포함한 유기체의 정보를 알아낼 수 있다고 말입니다. 따라서 생명공학은 정보기술과 구별할 수 없는 학문이 될 것이며, 앞으로 구글과 텐센트(중국의 인터넷기업) 같은 기업들은 단지 컴퓨터와 기계보다는 생명 형태를 엔지니어링하는 사업을 하게 될 것입니다.
⑤ 부제목으로 ‘미래의 역사’를 선택하셨는데 역설적인 단어를 고르신 이유가 궁금합니다.(윤가영 님의 질문)
A: 실제로 <호모 데우스>가 내일의 역사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지었습니다. 미래를 예견하기보다는 과거가 미래에 대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가 무엇인지를 설명하려 합니다. <호모 데우스>는 단 하나의 결정론적인 미래를 묘사하기보다는, 인류의 미래에 관한 다양한 질문을 제기합니다. 예를 들면, 인공지능이 인력시장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되는가? 라는 질문에 예상할 수 있는 다양한 해답을 제공합니다. 인간은 원래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는 존재이지만, 오늘날은 급속한 기술 발전 속도로 인해 그 어느 때보다도 예측이 어렵습니다. 역사상 처음으로, 30년 후 세상이 어떤 모습일지를 아무도 예상할 수 없습니다.
천년 전인 1017년에는 미래에 대해 알지 못한 것이 많이 있었지만, 인간사회의 기본적인 특징에 관해서는 꽤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당신이 1017년 고려시대의 한국에 살고 있었다면, 1050년경에 왕조가 망할 수도 있고, 서쪽으로부터 거란이 침략하고 역병이나 지진이 수백만 명의 인명을 앗아갈 수도 있음을 알기는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1050년대에도(1017년과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한국사람들은 여전히 농부로 일하고, 남성은 여전히 여성을 지배하고, 기대 수명은 약 40세이며, 인간의 몸은 그대로 변함없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반면에 오늘날 우리는 한국 혹은 나머지 세계가 2050년에는 어떤 모습일지를 전혀 가늠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생업으로 무슨 일을 하게 될지 모르며, 성별 간 관계가 어떤 모습일지, 사람들의 수명이 지금보다 훨씬 더 길어질지 알 수 없으며 인간의 몸 자체가 생물공학과 두뇌-컴퓨터의 직접적인 인터페이스로 전례 없는 혁신을 겪게 될지도 모릅니다.
역사상 처음으로, 어린 학생들과 대학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에 대한 아무런 대책이 없습니다. 1017년의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벼를 심는 법과 비단 짜는 법, 혹은 유교경전 읽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이러한 기술이 1050년에도 여전히 필요할 것임이 명백했지요. 반면, 오늘날 학교에서 아이들이 배우는 것의 대부분이 2050년경에는 필요 없을 수도 있습니다.
⑥ Q: 인간과 인공지능의 가장 큰 차이는 결국 "의식"의 유무인데, 시스템에서는 의식은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유발 하라리 작가님이 설명했듯이 과학과 경제에는 브레이크가 듣지 않습니다. 의식이 없는 기능적인 AI는 약한 AI개념에 속하고 인간과 같은 의식을 가지는 AI를 강한 AI라 규정하고 이미 이를 창조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잘 알겠지만 AI 개념의 원조라고 할 만한 HAL9000(스페이스 오디세이 2001)은 정신병을 일으키는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레이 커즈와일은 인간의 ‘의식’ 자체가 일종의 생화학적 알고리즘의 일종이므로 이를 비유기적 알고리즘으로 구성된 프로그램으로 대체 가능한 개념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강한 AI, 즉 인간과 비슷하거나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면모를 가진(지능만 높은 AI가 아니라 인간의 약점까지 그대로 가진) 출현할 수 있을지에 대한 작가님의 의견이 궁금합니다. 레이 커즈와일은 이러한 비정상적인 인간적 욕망을 가진 AI의 출현은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굳이 만들 효용이 없고 그런 식의 공상과학은 잘못된 유비추리에서 비롯된 것이라 주장합니다(인간의 의식이 문제 있으니 인공지능의 정신도 문제 있을 거라는 식의 인간적인 관점에 빠진 추정). 이에 대한 작가님의 생각은 어떤지 묻고 싶습니다. (agny**** 님의 질문)
A: 먼저 이렇게 살펴봅시다. AI가 정서지능과 예술 같은 인간의 영역으로만 여긴 분야에서 조차도 우리와 경쟁을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이미 AI가 사람의 감정을 감지하고 예술을 창작하는 분야에서 인간보다 더 잘하고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의 감정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저는 당신의 얼굴 표정과 목소리 톤 같은 외부적인 신호를 분석하여 알아챕니다. AI는 똑같은 분석을 저보다 더 정확하게 할 수 있으며, 통상 저의 눈과 귀가 보고 들을 수 없는 수많은 내적 지표를 동시에 분석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혈압, 뇌의 활동,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기타 바이오인식 데이터를 모니터하여, AI는 당신이 화가 나 있는지, 사랑하는지 혹은 고통을 느끼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술에 있어서도, 만약 예술의 목적이 사람의 어떤 특정 정서를 고무시키는 것이라면 머지 않아 컴퓨터가 사람보다 더 나은 예술가가 될 것입니다. 컴퓨터가 스스로의 어떤 감정을 지니지는 않겠지만 인간보다 더 잘 인간의 감정을 분석하고 조종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마치 컴퓨터가 키보드인 것처럼, 우리의 감정을 가지고 놀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서지능이나 예술에서조차도 AI와 경쟁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다른 시각으로는, AI가 예측 가능한 미래에 인간처럼 될 가능성은 낮으며, 특히 AI가 의식을 개발할 가능성은 낮습니다. 공상과학 영화는 대개 지능을 의식과 혼동하고 있으며, 인간과 지능을 겨루고 능가하기 위해서는 컴퓨터가 의식을 개발해야 한다고 추정합니다. 대부분의 공상과학 영화의 줄거리는 컴퓨터가 의식을 개발할 경우에 어떤 일이 일어날까?라는 의문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흔히 주인공인 인간이 컴퓨터와 사랑에 빠지거나, 컴퓨터가 모든 인간을 죽이려 합니다.
지능과 의식은 사실상 매우 다른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줄거리는 비현실적인 시나리오입니다. 지능은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인 반면, 의식은 어떤 것을 느끼고 욕망하는 능력입니다. 포유동물은 이 두 능력이 함께 작동합니다. 포유동물은 어떤 것을 느낌으로써 문제를 해결합니다. 따라서 지금까지 고등지능은 항상 의식과 관련 있었습니다. 바둑을 두고, 차를 운전하고, 전쟁을 하고, 질병을 진단할 수 있었던 유일한 존재는 의식을 지닌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지능은 이제 의식으로부터 분리되고 있습니다. 우리보다 더 잘 바둑을 두고 차를 운전하며, 전쟁을 하고 질병을 진단할 수 있는 무의식의 알고리즘을 우리는 개발하고 있지만, 아직 그것은 아무런 의식을 갖고 있지 않으며, 의식을 개발하려는 증거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바둑에서 이세돌을 이긴 AI인 알파고는 놀라운 지능을 지니고 있지만, 의식은 전혀 없습니다. 알파고는 바둑을 두는 동안 불안감을 느끼지 않았고, 바둑을 이겼을 때도 기쁨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알파고는 전혀 감정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⑦ Q : 미래에 지배층은 어떤 신화를 가지고 공동체의 안정화를 이루기 원할까요? 특별히 경제적, 민주적 과도기를 거치고 있는 한국의 미래를 어떻게 보시는지요? (miam**** 님의 질문)
A: 한 가지 가능성은 데이터교(Dataism)가 지배적인 신화가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데이터교는 충분한 데이터와 컴퓨터 연산능력을 결합한다면, 기업과 정부가 알고리즘을 만들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 알고리즘은 제가 제 자신을 아는 것보다 저를 더 잘 알기 때문에 제가 무엇을 바라는지 이해하고 제가 내릴 결정을 예측하고 저를 대신해 더 나은 결정을 내릴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권위가 인간에서 알고리즘으로 옮겨갈 것입니다.
이러한 알고리즘은 대단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지만, 대단히 위험하기도 합니다. 알고리즘이 우리를 매우 잘 알게 되면, 독재정부가 시민들을 절대적으로 지배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의 북한보다도 훨씬 더 심해서 독재정부에 저항하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조차 사람들이 새로운 종류의 탄압과 차별의 희생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이미 점점 더 많은 은행, 기업, 기관 들이 우리와 관련된 데이터를 분석하여 결정을 내리기 위해 알고리즘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은행에 대출을 신청하면 신청서류는 사람보다 알고리즘에 의해 다루어질 확률이 큽니다. 알고리즘이 여러분과 관련된 많은 양의 데이터와 수백만 명의 다른 사람들의 통계를 분석하여, 여러분을 믿고 대출을 해줘도 될지 결정합니다. 종종 알고리즘은 사람보다 은행원의 업무를 더 잘 수행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알고리즘이 만약 어떤 사람들을 부당하게 차별한다고 해도 알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은행에서 대출을 거절 당해서 “왜 안 되나요?” 하고 물으면, 은행에서는 “알고리즘이 안 된다고 했어요.” 하고 대답합니다. “왜 알고리즘이 안 된다고 했죠?” 하고 묻는다면, 은행에서는 “우리도 알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이 알고리즘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발달된 기계학습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알고리즘을 믿습니다. 그래서 당신에게 대출을 해줄 수 없습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과거에는 사람들이 여성, 동성애자, 흑인과 같이 그룹 전체를 차별했습니다. 그래서 여자, 동성애자, 흑인은 조직을 만들어서 그들에게 가해지는 집단적 차별에 대항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알고리즘이 당신에게 차별을 가할 수도 있는데 왜 그러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아마도 당신의 DNA나 개인사에서 알고리즘이 싫어하는 무언가를 찾았을 겁니다. 알고리즘은 당신이 여자여서 또는 동성애자여서 또는 흑인이어서 차별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당신이 당신이기 때문에 차별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특정한 부분을 알고리즘이 좋아하지 않는 것입니다. 당신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고, 설사 안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과 조직을 만들어서 대항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냥 당신뿐입니다. 20세기 같은 때에 있었던 집단적 차별 대신, 21세기에 우리는 개인 차별이라는 큰 문제에 직면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⑧ Q: 교육은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 저자의 고견이 듣고 싶습니다. 한국은 아직도 주입식 교육과 그로 인한 선행학습의 폐해로 공교육은 무너지고 있고, 대학의 간판에 매몰된 관료사회에서 명문대학은 아직도 유효한 명찰이기에 악순환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실정입니다. 진짜 인재를 양성하는 데 실패한 국가는 더 이상 존재키 어렵다고 보는데요. (특히 한국이라는 나라가 그렇습니다.) 급변하는 사회에 발맞춰 진화해야 할 교육의 모습은 무엇이고 그것을 받쳐줄 사회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다이스케 님의 질문)
A: 2040년의 인력시장이 어떤 상황일지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어떻게 아이들을 가르쳐야 하는지도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현존하는 많은 직업이 2040년까지 사라질 것입니다. 어떤 새로운 직업이 (생긴다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학생이 현재 학교에서 배우는 내용은, 그들이 40세가 될 때쯤이면 쓸모없어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요? 개인의 회복력, 정신의 균형, 그리고 몸의 균형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말씀 드리겠습니다. 전통적으로, 삶은 크게 둘로 나뉩니다: 배움의 시기와 뒤이어 오는 일하는 시기입니다. 삶의 첫 부분에서는 안정적인 정체성을 구축하고, 개인적이거나 전문적인 기술을 얻습니다. 삶의 뒷부분에서는 정체성과 기술에 의지하여 세계를 누비게 되고, 생계를 유지하거나 사회에 공헌합니다. 2040년까지 이러한 전통적인 양식은 쇠퇴하게 될 것이며, 인간이 게임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삶을 통해 끊임없이 무언가를 배워 되풀이해서 자신을 재창조하는 방법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2040년의 세계는 오늘날의 세계와는 매우 다른, 대단히 빡빡한 세계일 것입니다. 변화의 속도가 더욱더 빨라질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는 항상 배우고 자신을 반복하여 재창조하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60대라고 해도 말입니다.
그러나 일정한 나이를 넘어가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변화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16세에는 좋든 싫든 삶 전체가 변화입니다. 몸도 변하고 마음도 변하고 관계도 변합니다. 모든 것이 유동적입니다. 자신을 발견하느라 바쁩니다. 40세가 되면 변화를 좋아하지 않고 안정을 원합니다. 하지만 21세기에는 그런 호사를 누릴 수 없습니다. 정체성, 직업, 세계관 등에서 안정성을 고수하려고 하면 뒤쳐지게 되고 세계는 당신을 두고 날아갈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단히 회복력이 좋아야만 하며, 이 끝없는 폭풍 속을 항해하려면 정신적인 균형도 필요합니다.
문제는 아이들에게 정신적 균형, 회복력을 가르치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사실입니다. 책을 읽거나 강의를 듣고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의 교육 방식은 19세기 산업혁명 당시에 고안된 것으로, 지금은 파산선고를 받은 셈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실행 가능한 대안을 지금까지 만들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제가 열여섯 살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조언은 어른들을 너무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어른들을 믿는 것이 ‘안전빵(safe bet-틀림없이 이기는 내기)’이었습니다. 어른들이 세계를 무척 잘 알았던 데다 세계가 서서히 변화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21세기는 다를 것입니다. 어른들이 경제, 철학, 또는 관계에 대해 배운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아마 시대에 뒤처질 것입니다. 비슷하게, 기술도 너무 믿지 마십시오. 기술이 당신을 위해 봉사하게 해야지, 당신이 기술을 위해 봉사해서는 안 됩니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기술이 당신에게 목표를 강요하고 당신을 자신의 노예로 만들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을 더 잘 알아가는 것밖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당신이 누구인지, 삶에서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십시오. ‘너 자신을 알라’는 물론 오래된 조언이지만, 21세기에 가장 시급한 조언입니다. 지금 당신이 경쟁을 하기 때문입니다. 구글, 페이스북, 아마존, 그리고 정부는 모두 빅데이터와 기계학습을 통해 당신을 점점 더 잘 알아가고 있습니다. 일단 구글이 당신이 스스로를 아는 것보다 당신을 더 잘 알게 되면, 구글은 당신을 통제하고 조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계속 게임을 하려면 구글보다 빨리 달려야 합니다.
다른 조언을 드린다면, 몸에 더 집중하라고 말씀 드리겠습니다. 지난 세기 동안 기술은 우리가 몸에서 멀어지게 했습니다. 우리는 냄새를 맡고 만지고 맛보는 것에 집중하는 능력을 잃었습니다. 대신 스마트폰과 컴퓨터에 굉장히 몰두합니다. 우리는 사이버 공간이나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일에 바로 여기에서, 바로 지금 일어나는 일보다 훨씬 더 흥미를 느낍니다. 예를 들어 멀리 떨어진 스위스에 사는 사촌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그 어느 때보다 훨씬 쉬워졌지만, 아침을 먹으면서 배우자와 얘기하는 것은 더 어려워졌습니다. 그 사람이 줄곧 제가 아닌 스마트폰을 보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인간은 이런 무심함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고대의 약탈자와 소작농들은 항상 정신을 차리고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버섯을 찾기 위해 숲을 방황할 때 그들은 불룩한 것을 찾기 위해 오직 땅을 바라보았고, 호랑이가 다가올 때를 대비하여 조심스럽게 바람의 냄새를 맡았습니다. 뱀이 숨이 있는지 알기 위해 풀숲에서 들리는 아주 작은 움직임에도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들이 버섯을 발견하면, 식용버섯과 독버섯을 구별해주는 미묘한 맛의 차이를 느껴가며 최대한 주의하면서 먹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렇게 날카로운 의식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문자메시지를 보내면서도 슈퍼마켓 안을 돌아다니며 수천 가지 다른 요리를 구입할 수 있습니다. 모두 보건당국에서 검사를 마친 것들입니다. 이탈리아 피자든 중국면이든, 무엇을 선택하든 화면 앞에서 서둘러 먹으면서 이메일을 확인하거나 TV 프로그램을 봅니다. 실제 맛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자신의 몸, 감각, 그리고 신체적인 환경으로부터 멀어지는 사람들은 극도의 소외감과 혼란을 느끼기 쉽습니다. 전문가들은 종교나 민족주의의 쇠퇴에 대해 소외감을 느끼는 것을 종종 비난하지만, 몸과 환경과의 접점을 잃는 것이 어쩌면 더 중요할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몸에서 편안함을 느끼지 못한다면 세상에서도 절대 편안함을 느낄 수 없을 것입니다.
⑨ Q: 저는 로봇에게 인간과 같은 도덕과 법의 기준을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이에 대해 인류의 대응 방향이 어떻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권혁규 님의 질문)
A: 로봇에게 의식이 없는 한, 그 자체로 윤리적인 지위를 갖지 않습니다. 로봇이 고통과 비참함을 느낄 수 없다면, 기계적으로 얼마나 정교하든 그저 생명이 없는 물건일 뿐입니다. 하지만 로봇과 인공지능에게 우리를 위해 도덕적인 결정을 내리라는 요구가 점점 커질 것입니다. 구직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21세기에 누군가를 어떤 자리에 고용할 것인지 결정하는 것은 점점 더 알고리즘에 의해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적절한 도덕적 잣대를 정함에 있어 기계에 의지할 수 없습니다 – 여전히 인간이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일단 우리가 구인시장에 적용할 도덕적 기준을 정하게 되면, 그것을 인간보다 잘 수행하는 기계에 의지할 수는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동성애자를 차별하는 것이 비도덕적이라고 결정하면, 이 지침을 인간보다 잘 따르는 알고리즘을 믿을 수 있습니다. 인간 매니저가 동성애자를 차별하는 것이 비도덕적이라는 것을 알고 동의하더라도 동성애자가 지원할 경우 무의식적으로 그를 차별하고 고용하지 않기로 결정할 수도 있습니다. 컴퓨터를 이용해 지원서류를 가려내게 하고 컴퓨터가 성적취향을 전적으로 무시하도록 프로그래밍을 하면, 컴퓨터가 확실히 이 요인을 무시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컴퓨터에게는 무의식적인 감정이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지원서류를 선별하도록 소프트웨어를 프로그래밍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엔지니어들이 어쩌다 자신의 무의식적인 편견을 프로그램에 반영할 위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서 인종차별주의나 동성애를 혐오하는 편향을 없애는 것보다 컴퓨터 소프트웨어의 오류를 제거하는 것이 아마 더 쉬울 것입니다.
⑩ Q: 이스라엘 사람이면서 히브리 대학의 역사교수인 유발 하라리 님의 종교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Esther Shin 님의 질문)
A: 저는 종교가 없습니다. 하지만, 영성은 삶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종교와 영성을 구별한다면, 영성은 질문이고, 종교는 답입니다. 영성이 자기 자신과 세상을 더 잘 이해하도록 탐색하게 만든다면, 종교는 여러분에게 특정한 종교적인 이야기를 믿으라고 요구합니다. 감히 의심하거나 의문을 갖지 말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저는 종교적인 사람은 절대 아니지만, 매우 영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질문을 던지고 질문들이 저를 이끄는 곳으로 향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스라엘에서 보낸 10대 시절과 이후 옥스포드 대학교 학생으로서, 저는 매우 방황했습니다. 세상이 말이 안 되는 것처럼 느꼈고, 삶에 관한 중요한 질문들에 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특히 저는 이 세상에, 그리고 제 삶에 왜 그렇게도 많은 고통이 존재하는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제 주변 사람들과 제가 읽는 책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신, 국가, 돈에 관한 허구의 이야기뿐이었습니다. 저는 그게 진실이 아님을 깨달을 만한 지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삶의 진실을 찾을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옥스포드 대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한 친구가 제게 1년 동안 위빳사나 명상 코스에 가보라고 권유했습니다. 저는 그게 무슨 뉴에이지 미신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거절했습니다. 하지만 1년 후 저는 그냥 한번 해보기로 했습니다. 제가 잃을 게 뭐가 있었겠습니까?
명상 코스의 선생님인 S. N. 고엔카는 학생들에게 가부좌를 틀고 앉아 눈을 감고, 코를 통한 들숨과 날숨을 관찰하면서 명상을 시작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선생님은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숨을 통제하려고 하지 마세요. 그저 현재, 이 순간의 실체를 관찰하세요. 그것이 무엇이든 관계 없어요. 숨이 들어오면, 그냥 알게 될 거예요. 지금 숨이 들어오고 있다는 것을. 숨이 나가면, 그냥 알게 될 거예요. 지금 숨이 나가고 있다는 것을. 당신이 집중력을 잃거나 당신의 마음이 기억과 환상 속을 방황하기 시작하면, 그냥 알게 될 거예요. 지금 내 마음이 숨으로부터 벗어났다는 것을.” 그것은 제 삶에서 누군가 제가 말해준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매일 2시간씩 명상을 합니다.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것은 아닙니다. 현실과 접촉하는 것입니다. 하루에 최소 2시간 동안은 실제로 그 모습 그대로의 현실을 관찰하지만, 나머지 22시간 동안은 이메일이나 트위터, 웃긴 고양이 동영상에 정신이 팔립니다. 이 명상법을 수행하면서 얻게 된 명쾌함이 아니었다면, 저는 <사피엔스>나 <호모 데우스>를 쓰지 못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