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유학 간 조카가 내 동생, 즉 양희경의 뒤를 따라 배우가 되고 싶어 연기 학교에 들어갔다.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며 까다롭기로 유명한 교수님들을 자주 울린단다. 창작연기 과제를 하려면, 생각은 우리말로 한 다음 그걸 일일이 번역하고, 5분 안에 자기를 표현해내야 한단다. 다른 학생들보다 시간도 몇 배로 더 드니 과제를 다 마치고 나면 진이 빠진단다.
“너, 놀라운 아이구나! 어디서 무얼 하다 온 거니?”
“너 같은 아이는 처음 봤다.”
“교수 생활 몇 년에 이 노래를 너같이 부르는 사람은 처음이다. 내 친구네 극단이 꽤 괜찮은 곳이야. 너를 추천했단다. 남은 공부를 더 할래? 아니면 한국에 갈래?”
교수마다 반응이 대단하니까 되레 그 녀석이 더 당황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아이들은 부쩍부쩍 실력이 늘고 잘하는 게 보이는데, 자기는 그냥 그 자리에서 맴돈다는 생각, 소위 슬럼프에 빠져버렸다.
교수가 조카에게 묻더란다.
“뭔가 부족하다고 느끼니? 너 학교 끝나고 집에 가서 뭐 하니?”
“잘 때까지 대본 보면서 공부해요.”
“그래? 그럼 대본을 보지 말아봐.”
바로 그 얘기다. 자기 생활은 버려두고 대본만 들입다 파고 있어 봤자 생활이 없는 배우는 진짜 배우가 아니란 말이다. 생활이 없는 방송인 역시 껍데기다. 빙산의 밑동이 든든해야 그 일각이 드러나는 법! 일상생활의 밑바탕, 살아 있는 이야기, 삶의 고비들이 밑에서 든든하게 받쳐주어야만 방송에서 하는 말도 살아난다. 일상이 정지된 화면에서 맴돌면 우리 직업군의 사람들은 뭔가 맛이 없는 밍밍한 말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
사생활에서 나는 철저히 주부로 산다. 라디오 방송, TV출연, 공연 등등 일이 물론 중요하지만 퇴근 후의 사생활도 소중하다. 내가 무대에서든 방송에서든 살아 있는 얘기를 할 수 있는 것도 ‘일하는 양희은’ 외에 주부로서의 일상이 탄탄하게 받쳐주고 있기 때문이다.
결혼하고 변함없이 늘 같은 일상, 즉 장을 봐서 재료를 다듬고 준비해 맛있는 음식을 만들 때, 그리고 남편이 그 음식을 맛있게 먹어줄 때만큼 행복한 일도 없다. 장을 본 후, 몇 가지 반찬을 만들고 남편과 식탁에 앉으면 그렇게나 마음이 편안하고 그제야 사람답게 사는 것 같다.
내 부엌에서 나만의 방식으로 밥을 해 먹는 일, 제철 채소를 사다가 나물을 무치고, 맑은 국을 끓이고 제철 생선 두어 마리를 맛나게 굽는 일. 그게 무슨 대수냐고 웃을지는 몰라도 내게는 중요하다. 일 바깥의 일상을 소중히 하는 것, 그것이 내 일의 비결이다.
도서소개
그러라 그래| 2021-0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