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안은 대대로 머리숱이 없고
머리카락이 빨리 하얗게 변하는 유전자가 있다.
의학적으로 보자면 멜라닌 색소가 빨리 부족해지는 현상이다.
친정어머니는 갸름한 얼굴형과 단정한 이목구비를 지니신
대단한 미인이셨다.
눈치 없는 분들이 내 면전에서
따님이 어머니를 못 따라간다고 말씀하실 정도였다.
나는 아쉽게도 부계를 닮았다.
그런 친정어머니도 말 못 하는 고민이 있으셨으니,
바로 머리숱이 부족한 거였다.
살짝 비밀을 공개하면
친정어머니는 50대 초반부터 가발을 쓰고 다니셨다.
절대 남에게 보여주지 않으셨지만
큰딸인 나에겐 가끔 답답하다며
가발 벗은 모습을 보여주실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면 나는 걱정이 태산이다.
‘나도 어머니처럼 되면 어쩌나?’
그때 생각했다.
‘나는 가발도 쓰지 않고 파마도 하지 말아야지.’
파마할 때 쓰는 독한 약품이 두피를 혹사해서
가뜩이나 빈약한 머리숱이 더 사라질까 염려했다.
실제로 나는 단 한 번도 파마를 한 적이 없다.
늘 짧은 머리를 유지하고
가능한 한 두피에 스트레스를 주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게
나의 머리숱 관리법이다.
40대 중반, 큰아들의 생사를 넘나드는 큰 수술 뒤
머리카락이 하얗게 변해
50대 초반까지 염색을 했다.
2주가 지나면 어김없이 자라나는 흰머리를 감추기 위해
장장 세 시간에 걸쳐 머리를 다듬고 염색을 하는 고역을 치렀다.
그럴 때마다 ‘언제까지 이 의식을 계속 치러야 하나?’
고민하던 중 아주 특별한 어떤 모습을 보게 되었다.
가톨릭 재단을 통해 한국에 입국하여
외국어대 이탈리아어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한 교수님이 계셨다.
그분이 치매를 앓게 되어
부천의 한 노인요양병원에 입원을 하시게 되었다.
5개 국어에 능통하셨던 분이었지만
치매로 인해 가장 마지막에 배운 언어부터 잊으시더니
나중엔 겨우 모국어 몇 단어만 쓸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분이 이탈리아어를 완전히 잊지 않도록
여유 있을 때마다 요양원을 찾아가 언어 연습을 도와드렸다.
그 요양원에 드나들면서
어르신들의 외관을 보다가 공통점을 발견했다.
어르신들의 머리는 관리하기 편하게 대부분 짧았고
머리색은 모두 염색하지 않은 천연 백발이라는 것.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삶의 본질만 보고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 다짐은 염색을 하지 않는 실천으로 표현됐다.
막상 염색을 하지 않으려니 용기가 필요했다.
염색하지 않을 때의 장점을 꼽아보았다.
먼저 염색하는 동안 불편한 자세를 취해야 하니
팔이 아픈 고통에서 해방된다는 것.
나는 알레르기가 있어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염색약을 사용할 수 없는데
내게 맞는 염색약을 찾는 일거리가 줄어든 것.
염색약이 수질 오염의 한 원인인 만큼
내가 지키고자 노력하는
자연 친화적인 삶에 더 가까워진다는 것.
이렇게 여러 장점이 있었다. 단점은 딱 한 가지,
나이 들어 보인다는 것.
‘어차피 나이 들어가는데 그냥 받아들이자.’
그렇게 마음을 굳게 먹고
벼르고 벼르던 삭발식과 염색 해방식을 감행했다.
삭발하지 않으면
흰 머리카락, 헤나로 염색한 갈색 머리카락,
탈색되지 않은 검은 머리카락까지
세 가지 색의 향연을 몇 달은 견뎌야 하기에
성질 급한 내가 선택한 해결책이 삭발이었다.
그때 내 나이 쉰다섯 살이었다.
폐경의 징조가 보이고 몸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으니
삭발하기 좋은 나이였다.
삭발하고 염색에서 해방된 뒤 친정어머니로부터
어쩌자고 그리 추하게 늙어 보이려고 하는 거냐는
꾸지람을 들었다.
할아버지 같다는 이야기도 두 번이나 들었다.
한번은 내가 자주 가는 보육기관에 사는 꼬맹이가
“흰머리가 짧은 건 할머니가 아니지! 할아버지지!”라고
정의를 내렸다.
언젠가 봉쇄수도원의 수녀님께서도
무심코 나를 할아버지라고 부르시더니
아차! 싶으셨는지 무안해하셨다.
염색하지 않은 지 15년 정도 흘렀다.
이제는 흰머리가 멋있다고 말해주는 사람들이 더 많다.
할머니면 어떻고 할아버지면 어떤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는 편안함이 있는데!
이것이 진정한 자유로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