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옷을 사지 않기 위해 몸무게를 유지한다.”
〈EBS 초대석〉에 출연하여 내가 한 말이 화제가 되었다.
패션계에서 일했던 사람이 옷을 거의 사지 않는다니,
의심의 눈초리도 있는 듯하다.
실제로 나는 옷을 무분별하게 사지 않고
한 번 산 옷을 오래 입는다.
유행의 산실인 파리의 아성에 도전하며
언제부턴가 나란히 어깨를 견주게 된 밀라노,
그 도시 한복판 번화가의 뒷골목에
노신사 프랑코 이아카시Franco Iacasi의 보물 창고가 있다.
이 보물 창고 안에 있는 보물들의 정체는 바로 넝마다.
이 가게의 소장품은
대부분 1800년대 말부터 제작된 의상들인데,
지나가면서 흘깃 보아도
오래된 옷이라는 걸 한눈에 알 수 있다.
그런데 그 노신사는 왜 넝마를 신줏단지 모시듯 보관할까?
이유인즉, 찾아오는 귀한 손님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였다.
이곳을 찾은 귀한 손님들의 리스트에는
파리, 뉴욕, 밀라노, 런던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세계적인 톱 패션 디자이너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유명 톱 디자이너들이 왜 비싼 값을 주면서까지
프랑코 이아카시의 넝마를 사갈까?
돌고 도는 패션 트렌드를 만드는 자양분이
이 넝마이기 때문이다.
유명 디자이너들은 개인 아카이브가 있다.
그들은 오래전의 의생활이 담긴 고서적에서부터,
긴 세월을 지난 유서 깊은 옷에 이르기까지 수집하여
자신의 아카이브에 넣어두고 꺼내본다.
조르지오 아르마니와 같은 디자이너는
데뷔 의상, 역작, 드로잉 등을 차곡차곡 모아서
자신의 이름을 딴 박물관을 개관했다.
톱 패션 디자이너들은 유행이 돌고 돈다는 사실을 알기에
오래된 의상을 21세기 소비자들의 취향에 맞게 변형하여
새로운 옷을 선보인다.
오래전 자신이 만든 초기 의상에
현시대 감성을 불어넣어 컬렉션을 하기도 한다.
현시대 감성을 반영한 디자인이란
단추를 바꾸거나, 어깨 부분을 늘이고 줄이거나,
스커트 길이를 늘이고 줄이거나,
바지의 허리선을 올리고 내리는 등으로 변형한 것이다.
가장 최근에 개발된 원단을 사용하여 신선미를 강조하고
때로는 레트로retro라는 이름으로
과거의 유행을 그대로 재소환하기도 한다.
이렇게 유행은 돌고 돈다.
또 재미있는 사실 하나!
유행을 창조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 가면
오히려 유행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앞으로의 트렌드를 알고 싶다면
오래된 서점과 의류를 파는 곳을 가보면 된다.
까다로운 디자이너일수록 컬렉션을 준비할 때
한 가지 옷만 몇 날 며칠 내내 입는다.
컬렉션에 몰두하기 위해서다.
한때 뉴욕의 톱 패션 디자이너였던 캘빈 클라인도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컬렉션을 준비하는 동안 신경이 곤두서서
한 달 내내 같은 장소에서 같은 옷을 입고,
그곳에서만 먹고 자면서 오로지 컬렉션에만 몰두합니다.”
마치 고인이 된 스티브 잡스처럼 캘빈 클라인도
새로운 제품을 발표하기 위해
옷에 신경 쓸 여유가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항상 유니폼 같은 옷을 입지 않았던가!
조르지오 아르마니, 돌체 앤 가바나 등 많은 디자이너들은
패션쇼를 끝내고 잠깐 무대로 나와 인사할 때 공통점이 있다.
대부분 검은색 티셔츠에 짙은 색 바지를 입고
무대에 나온다는 것.
자신의 상품이 잘 팔릴 수 있도록 준비하기 위해
정작 자신을 꾸밀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일까?
매 시즌 유행에 몰입하다 보니 신물이 나서일까?
혹은 좋게 표현해서, 옷에 초월해서일까?
예상컨대 모든 게 다 이유가 될 것 같다.
영국의 유명한 디자이너 비비안 웨스트우드도
프랑코 이아카시의 보물 창고에서 횡재한 옷을 입고 다녔다.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보조 디자이너로 근무하는
마랑고니 패션스쿨의 내 동창생이
직접 그 이유를 물어본 적이 있다.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대답은 간단했다고 한다.
“그냥, 입고 싶으니까.”
새로운 트렌드를 결정하는 전문가들이나
패션 칼럼니스트들이 자주 사용하는 단어가 있다.
‘패션 빅팀 fashion victim’
우리말로 직역하면 ‘유행의 희생자’가 될 텐데,
바로 이 유행의 희생자들을 위해 판매할 상품을 준비하느라
자신들은 유행과 동떨어진, 아니,
유행을 초월한 삶을 살기도 한다.
재미있는 아이러니다.
패션 현장에서 일하면서 느낀 솔직한 심정은
모든 게 ‘싱겁다’라는 거다.
(물론 여전히 나는 패션을 좋아한다 .
패션을 통해 기분 좋은 느낌을 주고받기도 하니까)
사실 옷이라는 게 별것인가?
아무리 색다른 스타일을 만들고 싶어도
두 개의 팔과 두 개의 다리를 가진 몸을 보호해야 한다는
대전제를 가진 것이 바로 옷이라는 개체 아닌가!
레트로라는 이름으로 돌고 도는 트렌드를 제시하는
유럽 패션계의 정보를 접할 때면
“그 옛날 디자이너들의 고물 대신, 미술품을 샀더라면
자산가가 되어 노후를 더 편하게 보냈을 텐데”라고 말하던
보물 창고의 주인 프랑코 이아카시의
다소 회한 어린 표정이 떠오른다.
내가 옷을 거의 사지 않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예전보다 호기심이 줄어들었고,
유행은 돌고 도는 법이니
옛날에 구입한 옷을 수선해서 입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이젠 매일 여러 사람을 만나며
나를 보여줄 일이 많지 않으니
나를 만족시키는 옷만 입으면 된다.
프랑코 이아카시의 보물 창고에 직접 가지 않아도
내 옷장을 잘 뒤져보면 레트로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좋은 원단으로 만들어진 옛날 내 옷에 새로 단추를 달고,
어깨 부분도 손 좀 보고, 길이도 약간 조절해주면
오래된 옷이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 옷으로 거듭난다.
다만 나날이 무너지는 보디라인을 유지하는 게
가장 큰 숙제이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