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 환경, 젠더, 인간의 부조리를 담은 걸작 그래픽노블
“스물한 살쯤 나는 알게 된다. 어떤 일자리든 좋은 일자리며, 형편없는 일자리마저 좋은 일자리라는 것을. … 2005년, 좋은 일자리, 좋은 돈벌이, 더 나은 인생을 위해 찾아갈 곳은 앨버타 북부의 오일샌드다.”
캐나다 유명 만화가 케이트 비턴의 첫 장편 그래픽노블이자, 그가 만화가로 명성을 얻기 직전 앨버타의 오일샌드 채굴 현장에서 보낸 2년간의 경험을 담은 회고록. 2022년 출간되어 뉴욕타임스, 뉴요커, 타임, NPR 등이 선정한 올해의 책 명단에 이름을 올렸고, 미국 만화계의 아카데미상으로 불리는 아이너스 어워드에서 최고의 그래픽 회고록 및 작가상을 수상하며 언론과 평단의 찬사를 받았다. 특히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올해의 책 리스트에 오른 첫 그래픽노블로 화제를 모았고, 캐나다 공영방송 CBC에서 주최하는 Canada Reads(그해 ‘캐나다 국민 전체가 읽어야 할 책’을 가리는 콘테스트)에서 대상을 받으며 캐나다 국민 책으로 올라섰다.
캐나다 동부의 해변마을에서 자란 문과생 케이트(작품 속에서는 주로 ‘케이티’로 불림)는 고향에서 일자리를 구할 수 없게 되자, “돈이 흘러넘치는 곳”이라는 소문이 자자한 서부의 앨버타 오일샌드 광산으로 떠난다. 목표는 한 가지였다. 자신의 목줄을 죄고 있는 학자금 대출을 단기간에 갚아버리고, 원하는 삶을 살겠다는 것. 그는 대형 석유 회사가 소유하고 운영하는 임금 수준이 높은 캠프 공구실에서 일자리를 얻지만, 그곳은 차별, 고립감, 환경 파괴 등이 너무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최악의 일터였다. 케이티는 더 높은 임금을 받기 위해 장시간 일하는 더욱 고립된 작업장으로 옮기지만, 이후 그가 겪고 목격한 것들은 그의 삶에 깊은 트라우마를 새겨놓는다.
가혹한 일터, 그리고 남자들의 세계
케이티의 첫 직장은 당시 캐나다 최대 규모의 오일샌드 채굴 프로젝트 현장인 ‘싱크루드’였다. 주된 업무는 공구실에서 현장 노동자에게 필요한 장비를 대여하는 일. 겉보기에는 단순한 일 같았지만, 근무 조건과 현장 상황은 열악했다. 겨울에는 햇빛이 거의 없었고 기온이 영하 40°C 이하로 내려갔다. 야간 교대근무가 많아 다음 날 녹초가 되기 일쑤였고, 추위로 굳은 손으로 더러워진 장비를 나르며 울음을 삼켜야 했다. 오염된 공기 때문에 기침과 가래가 끊이지 않았고, 피부에는 두드러기가 생겼다.
하지만 가혹한 현장보다 그를 더 괴롭힌 것은 압도적인 남초 비율(남성 50 대 여성 1)에서 비롯한 캠프의 비정상적인 문화였다. 남성들은 첫 만남에 대뜸 그를 ‘귀염둥이’라고 부르며 대수롭지 않게 성적 농담을 던졌고, 여직원의 사생활을 두고 험담하거나 유언비어를 퍼뜨리기 일쑤였다. 숙식을 제공하는 ‘롱 레이크’의 캠프로 직장을 옮기면서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종종 남성 직원이 실수인 척하며 그의 숙소 방문을 열고 들어왔고, 심지어 신입 여직원인 그를 ‘구경’하려는 남자들이 공구실 건물 주변으로 길게 줄을 선 채 외모를 품평했다. 케이티는 그런 상황에 대해 매니저에게 하소연했지만, 매니저는 “특별대우를 기대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발 들였을 때부터 이곳이 남자들 세상이란 걸 알고 있었잖아.
”
케이티는 캠프라는 환경이 아니었다면 ‘아버지’처럼 지극히 평범하고 멀쩡했을 사람들의 일탈을 보며 큰 충격을 받지만, 이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면 불만을 눌러 삼키는 수밖에 없으며, 문제를 공론화하기 위해서는 “미치광이 계집애” 취급을 당할 각오를 해야 한다는 비참한 교훈을 얻었다.
생명 vs. 돈
트라우마에 시달리던 케이티는 한동안 캠프를 떠나 있기로 했다. 부유한 은퇴자들의 도시인 빅토리아섬의 해양박물관에서 일자리를 얻지만, 아르바이트(가사도우미, 식품점 계산원)를 병행해도 캠프 수입에는 미치지 못했다. 은행으로부터 학자금 대출 상환 독촉 전화를 받은 그는 꿈같은 기억들(박물관, 오페라, 그를 향한 ‘레이디’라는 호칭)을 뒤로 하고 앨버타로 돌아왔다.
케이티는 대형 석유 회사 셸사에서 창고 관리직 자리를 얻지만, 노동자의 안전보다 이윤을 우선하는 오일샌드 기업의 모르쇠는 여전했다. 한쪽에선 계약직 노동자가 중장비에 깔려 죽고 코카인을 복용한 직원이 주차장에서 용변을 본 후 해고당했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지만, 다른 한쪽에선 회사가 “근로 손실 재해 없이 300만 인시人時 달성”을 자축하는 이메일을 직원들에게 보냈다. 케이티는 “안전 회의에서 약물에 대한 회의는 한 번도 없었다”라며 당혹스러워하지만, 동료들은 직원들의 정신건강 문제에 대해 쉬쉬하는 회사 분위기를 알려주었다.
한편 신문기사를 통해 싱크루드의 테일링 연못(채굴 작업 후 남은 찌꺼기를 채운 오염수)에서 오리 수백 마리가 떼죽음을 당한 뉴스를 접한 케이티는 오일샌드의 위험은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특히 포트 매케이의 크리족 원주민 공동체의 장로 셀리나 하프가 출연한 유튜브 방송이 결정적이었다. 장로는 그곳 원주민들 광산에서 배출되는 오염 물질로 오랫동안 심각한 질환에 시달려왔고 생명을 위협받고 있다고 호소했다. “전부 파괴되었습니다. 우리 삶이 파괴되었고, 우리의 물도, 공기도, 모든 것이. 우리의 생명을 대가로 돈이 벌리는 한, 그들은 우리가 얼마나 많이 죽어나가든 개의치 않습니다.” 케이티는 이제껏 폭력과 트라우마를 ‘당하는’ 쪽이라고 여겼던 자신이, 거꾸로 자신의 노동을 통해 석유 산업을 돕고, 환경을 파괴하고, 원주민의 삶의 터전을 빼앗는 데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깊은 혼란에 빠진다.
선과 악으로 가를 수 없는 이야기
야생동물, 오로라, 로키산맥 등 앨버타의 장엄한 자연을 배경으로 석유 산업이 펼쳐놓은 거대한 기계 설비와 그 속에서 하루하루 버텨가는 인물들의 섬세한 감정을 인상적으로 묘사한 이 작품은 그의 작가적 재능의 정점을 찍었다고 평가받는다. 특히 이 책의 미덕은 오일샌드를 “순전히 나쁜 곳”으로 규정하려는 통념에 저항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눈에 “오일샌드는 어떤 단순한 규칙에도 들어맞지 않는” 곳이었다. 캠프에는 “꼴통같이” 구는 남자들만 있던 것이 아니었고, 평범한 사람들이 더 많았다. 그를 아끼고, 따듯하게 대해주는 남자들도 여럿 있었다(오로라와 근사한 무지개를 찍은 사진을 작별 선물로 건네는 정비공 노먼, 우울할 기분을 풀어주기 드라이브를 권하는 장비 관리자 조, 그의 안부를 살피려고 먼 길을 찾아오는 같은 고향의 데이비 아저씨 등). 결국 케이티는 오일샌드에서 벌어지는 추잡한 일들을 캐묻는 <글로브 앤드 메일>의 기자에게 끝내 입을 열지 못한다. “최악의 모습일지라도 그 기자보다는 그들이 나와 더 닮은 꼴이야.” 그는 남성의 세계에서 차별받는 여성이었지만, 그의 계급적 정체성은 토론토의 쾌적한 사무실에서 전화를 거는 여성 기자보다는, 가난한 지방에서 돈을 벌기 위해 모인 동료들에 가까웠다.
“여기서 희롱을 겪는 동안 내가 가장 힘들었던 건 사람들이 불쾌한 말을 한다는 게 아냐. 그런 말을 할 때 그들의 말투가 나와 똑같고, 내가 대학에 가면서 버린 그 억양을 쓴다는 거야. 그들이 내 사촌과 삼촌들과 닮았다는 거야.” 케이티는 이미 오일샌드를 끔찍한 곳으로 단정하고 그 사례만 모으려는 기자에게 이런 복잡한 진실을 제대로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어쩌면 그가 당시 인터뷰를 청했던 기자에서 꺼내 놓기 주저했던 답변을 18년 만에 내놓은 것이 이 책인 셈이다.
우리 안의 ‘오일샌드’
책의 제목인 ‘오리들’은 테일링 연못에서 폐사된 오리 떼를 다룬 기사에서 처음 등장한다. 오일샌드 노동자들에 대한 비유로 읽히는데, 먹이를 찾아 오염된 서식지로 잘못 날아든 오리들처럼, 돈을 벌기 위해 이곳에 온 케이티와 동료들은 유독한 환경에서 몸과 마음을 다친다.
작가가 책 곳곳에 배치한 문화적 상징물과 암시를 읽어내는 재미도 쏠쏠하다. 캐나다는 큰 땅덩어리만큼이나 지역에 따라 민족 구성과 문화, 경제력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작가의 뿌리인 캐나다 동부의 케이프브레턴섬은 스코틀랜드 이주민 후손들이 대대로 살고, 아름다운 해변을 지녔고 랍스터가 특산물이며, 석탄과 철강 산업이 쇠퇴하면서 이제는 각 가정마다 이주하는 가족들로 ‘빈 의자’가 생기는 가난한 지방 도시다. 반면 그가 일자리를 얻은 동부의 앨버타 오일샌드 캠프는 쉽게 벌리는 돈만큼이나 각종 유흥업소가 즐비하고, 전국 각지의 지명을 딴 식당들과 침례교와 이슬람 건물이 뒤섞여 붐타운을 이룬다. 책 속에는 이런 지역적, 문화적 특징을 암시하는 묘사가 많은데, 간판, 노랫말, 책 표지 하나에도 의미가 있으니,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읽으면 작품의 맛을 더 깊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스물두 살의 케이티는 가족애가 깊고, 현실에 대한 이해가 빠르고, 당찬 인물로 그려진다. 힘겨운 상황에서도 자신의 목표를 위해 하루하루 버텨낸다. 독자들은 마지막까지 그의 해피엔딩을 응원하게 된다. 이제 ‘햇병아리’ 공구실 직원은 어느덧 마흔을 넘어 베스트셀러 작가라는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그가 오랜 시간 뒤 가슴 아프게 고백하는, 결국 고백할 수밖에 없는 이 이야기는 그의 개인적인 경험을 넘어설 것이다. “모두가 저마다의 오일샌드를 경험했다. 이것은 내가 겪은 오일샌드다.” 작가 후기의 첫 문장이다. 노동과 외로움, 자본주의, 젠더, 환경 파괴 등 이 책에 담긴 주제들은 우리 사회가 마주한 현실과도 많이 닮았다. 어쩌면 이 책에서 우리 안의 ‘오일샌드’를 떠올릴 한국 독자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뛰어난 스토리는 국경과 문화를 뛰어넘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