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동그란 마음으로 60년간 간직한 이야기
누구에게나 비밀 서랍이 있다. 다만 이 책을 쓴 저자의 비밀 서랍은 닫혀 있지 않고 언제나 열려 있다. 그 서랍 안에는 조가비와 돌멩이, 편지지와 색연필, 엽서와 손수건 등 손님에게 나눠줄 선물로 쓰일 사물들이 들어 있다. “선물은 돌고 돌아 결국 그것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돌아가야 빛난다고 생각”(9쪽)하는 그이기에, 평생 가진 것을 나눠주려고 서랍을 비우고 채우길 되풀이한다.
어느 사형수는 그에게 편지를 받고 “이모님, 모두 제게 회개하라고 하는데 제 안의 맑은 마음을 꺼내라고 한 분은 처음입니다”(35쪽)라는 답신을 썼고, 어느 독자는 그에게 받은 “글방 앞의 분꽃 씨”(45쪽)를 마당에 심어 분홍 분꽃을 피웠다. 사람들은 그가 건넨 작은 선물에 울고 웃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 값비싼 보석이 아니라 차갑지 않고, 값진 정성이라 뭉근한 온기가 느껴지기 때문이겠다.
그리하여 그가 살아온 흔적과 그가 건넨 눈빛은 시라고, 그가 손가락을 굽혀 쓴 한 줄은 외로운 희망을 외롭지 않은 곳으로 인도하는 시라고 세상은 말한다. 《소금꽃나무》의 저자 김진숙 선생은 “스물여섯 살에 해고되어 벌판에 홀로 선 듯 외롭고 막막할 때”(43쪽) 그의 시를 읽으며 위로를 받았고, 한 초등학생은 그의 책을 읽고 “나를 슬프게 하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자”(53쪽)라고 다짐했다.
이렇듯 모든 사람에게 꽃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는 한 시인, 이해인 수녀가 60년간 모은 이야기를 담은 책 《소중한 보물들》이 출간되었다. 인생의 여정을 정리하며 낡은 일기장을 들추며 쓴 글, 친구와 마지막 작별인사한 뒤 침방에 돌아와 쓴 시, 앞치마 안에 넣어둔 메모지를 꺼내 적은 기록, 일간지에 연재한 칼럼 일부를 공글려 엮었다.
1964년 수녀원에 입회해 “언제나 가난한 마음으로 별빛을 씹고 바람을 마시면서 사는 마음 착한 ‘아이’이고”(193쪽) 싶던 그가, 지금 우리 시대의 큰 어른이 되어“부족하나마 시로 누군가에게 작은 위로를 건네고, 기도를 멈추지 않는 자그마한 엄마”(191쪽)가 되길 겸허히 소망하며 꺼낸 〈첫말〉은 이것이다. “우리에게 소중한 것은 무엇일까.”(8쪽)
어쩌면 우리가 잊은 소중한 것들의 목록
책의 차례는 혹 우리가 놓쳐버린 소중한 것들을 되짚는다. 일일이 나열하면 셀 수 없기에 추려서 총 5부에 나누어 담았다. 책의 사진은 2022년 11월부터 2024년 4월까지 정멜멜 작가가 이해인 수녀와 동행하며 찍었다.
1부 〈글방의 따사로움〉은 1997년 가을 처음 문을 연 뒤 지금까지 열 평짜리 해인글방에서 하루를 보내는 이해인 수녀가 만난 사람들의 사연, 글방에 자리한 사물들의 사연을 풀어놓는다. 그는 자신을 “기쁨 발견 연구원”(51쪽)이라 칭하며, “조금의 노력만으로도 살며시 행복이 피어나는 소리”(49쪽)를 기억하며, 작은 시인으로 사는 작은 기쁨을 들려준다.
2부 〈생명의 신비로움〉은 환우 수녀가 일군 한 평 꽃밭부터 태산목, 만세선인장, 목화까지 자연에서 배우고 터득한 지혜를 공유한다. “솔방울을 지니고 있으면 산을 지닌 것”(67쪽) 같다니, “꽃향기를 맡으면 꽃사람이”(91쪽) 된다니, 흰나비에게 “조그만 풀포기도 기억해주니 고맙구나”(191쪽)라고 속삭이는 문장은 육중한 일상에 펼쳐진 아늑한 그늘 같아서 우리를 묵상하게 이끈다.
3부 〈수도의 향기로움〉은 고(故) 박완서 소설가가 아들을 잃고 마음의 회복을 경험한 언덕방부터 성당, 구름다리, 종탑까지 수녀원의 풍경을 스케치하며 동그란 마음을 그린다. 수녀원 생활도 인간사라 언짢은 일이 있는데, 그때 “오늘 용서할 일을 오늘 용서할 때 평화가 찾아온다”(121쪽)라고 한다. “작은 천사가 되려면 큰 포기를 할 줄 알아야”(121쪽) 삶의 언덕길을 숨 가쁘게 오르내리지 않을 수 있겠다.
4부 〈생활의 부드러움〉은 광안리 바닷가에서 조가비를 줍는 일부터 매일 겸손한 마음으로 신발을 신는 일까지 나의 하루를 안아주고 사랑하는 즐거움을 술회한다. “살아 있다는 건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자 이름이 불리는 것임을 다시금 생각하며”(139쪽)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의 이름을 떠올리며 안녕을 빌어주는 마음의 예쁨을 생각해보게 한다.
5부 〈추억의 아름다움〉은 어머니의 유품부터 문인들과의 일화까지 맑은 물에 깎이고 닦이는 돌처럼 추억도 시간이 흐르며 아름다워짐을 이야기한다. 5부 말미의 〈추억 단상〉은 수도 청원기 시절, 투병 시절을 거쳐 노년 시절에 이르기까지의 인생을 시간순으로 풀어놓으며 여운을 남긴다. “언제나 만남은 짧고 이별은 길다.”(197쪽)
아픔을 아프지 않게 껴안는 환대의 책
이해인 수녀는 〈끝말〉에서 “단순히 수녀가 쓴 글이라서 점수를 후하게 준 것일까. 그래서 관심과 조명과 인정을 받은 것일까. 내가 수도원 밖에 있었다면 독자의 사랑을 그리 오래 받지 못했을 거란 동료들의 말이 정말일까”를 자문한 적이 있다고 썼다. 이번 책에 실린 신작 시편 중 한 편인 〈그리움〉에서 “일생의 화두가/ 언제나 그리움이어서/ 삶이 지루하지 않고/ 내내 행복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리움’을 ‘행복’으로 치환한 시를 쓰는 시인에게 어떤 명함이나 직함이 필요할까.
그가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환대’, 아픔을 이겨내는 방식은 ‘명랑’, 시에 담는 주제는 ‘작은 위로’. 그러하니 그가 쓴 글에 무슨 말을 덧붙일 수 있을까. 그는 시와 산문으로, 작은 사랑이 목말랐던 우리의 심장에 따스함을 들여놓았다. 우리는 그의 글을 통해 꽃잎 한 장에도 무게가 있듯 사랑에도 무게가 있음을 알았고, 그래서 기꺼이 사랑의 무게를 겪으며 삶의 근육을 단단히 키울 수 있었다. 그러하니 그는 우리 시대의 든든함 버팀목이리라.
백 번 치는 종소리보다 한 번 치는 종소리가 마음속 깊이 울려 퍼지는 순간이 있듯, 《소중한 보물들》의 한 문장이 독자를 울리기도 할 터이다. “지극히 절제된 울음만 조용히 안으로 삼키다 보니 아무런 체면 없이 큰 소리로 우는 이들이 때론 부럽기도”(191쪽) 했다는 그의 티끌 없는 고백에 가슴 시리기도 할 터이다. 그러다 “묵언 수행하는 꽃들의 침묵만큼 분위기를 명랑하게 만드는 즐거운 수다쟁이”(88쪽)가 필요하다는 문장을 읽고 입꼬리를 올리기도 할 터이다. 독자는 이 책을 보물찾기하듯 읽다가 결국 알게 될 터이다. “아픔도 소중한 선물”(121쪽)이란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