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베리 수상작 《호랑이를 덫에 가두면》의 저자 ‘태 켈러’의 신간
- 자신이 물려받은 것의 뿌리를 이야기 속에 풀어 온 저자가 어린 독자들을 위해 쓴 신선한 판타지
- 진정한 자신과 자신만을 위한 곳을 찾아 나선 평범한 소녀 ‘미희’의 환상 가득한 모험 이야기
‘공주’라고 하면 떠오르는 몇몇 이미지가 있다. 눈처럼 새하얀 피부에 부드럽게 굽이진 머리카락, 아름다운 얼굴과 풍성한 드레스가 잘 어울리는 날씬한 몸, 아무리 힘들어도 웃음을 잃지 않는 밝고 긍정적인 성격, 악역은 물론이고 발밑의 풀 한 포기마저 소중히 여기는 선하디선한 마음 등등. 이런 유형의 공주는 각종 동화와 애니메이션 속에 아주 오랜 세월 변함없이 존재했으며, 그 모습째 고정 관념으로 굳어져 자신이 어디에 살건 그리고 어떤 사람이건 모두가 똑같은 공주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여기, ‘전형적인 공주’와는 거리가 멀지만 공주가 되길 꿈꾸는 소녀가 있다. 2021년 뉴베리상을 수상하며 이름을 알린 한국계 작가 ‘태 켈러’의 새 동화, 《그리고 미희답게 잘 살았습니다》 속의 주인공이다. 그동안의 작품에서 진정한 자신을 찾고 자신만의 스토리를 만들어 가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던 작가는 이번에도 한국계 미국인 소녀를 선택했다. 자신이 사는 세상에서는 완벽한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는 이민 가정의 아이이자 ‘아이’와 ‘여성’ 사이 어딘가에 걸친 아주 평범한 아이 ‘미희’가 위험하고도 환상적인 모험을 펼치는 가운데, 모험 끝에 어떤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지 제목처럼 정말 자신답게 ‘잘’ 살게 되는지 궁금증을 자아내는 동화이다.
취미는 공주 놀이요, 장래 희망은 공주인 ‘미희 완 박’. 동화 세계로 건너가다!
올해 4학년인 미희는 공주와 공주 이야기가 가장 좋은 한국인 소녀고, 공주 이야기를 나누고 공주 놀이를 하는 게 일과이다. 그런데 오늘 아침, 모든 게 달라졌다. 단짝 제네비브가 이제 공주는 유치하다며 미희랑 놀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혼자 남겨진 미희는 제네비브의 말이 틀렸다는 걸 증명하려고 사과나무에 올랐다가 ‘쉬는 시간 외출 금지’ 벌을 받고, 도서관에서 리즈와 사바나를 만난다. 미희는 새 친구들과 비밀을 나누어 더 친해지고 싶은 마음에 사서 선생님 사무실에서 사탕을 훔쳐 먹기를 제안하고, 왜인지 똑같은 사탕에서 각각 다른 맛이 느껴지던 그때, 소용돌이치는 냉장고 속에서 무지갯빛 세상을 마주한다.
냉장고 너머는 동화 속 세계였다. 구름이 인사하고, 풀이 스스로 길을 비켜 주며, 파랑새가 윙크를 날리는 꿈에서나 그리던 바로 그 동화 속 말이다. 미희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냉장고를 넘어간다. 하지만 그 발걸음에는 단순히 공주로서의 꿈을 이룰 수 있을지에 대한 호기심만 담겨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야기 초반 미희는 ‘아직 자신만의 궁전을 찾지는 못했어도 분명 어딘가에 속해 있을 중요하고 의미 있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했지만, 제네비브를 포함한 세상은 미희가 ‘공주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못 박는다. 날씬하지도 않고 예쁘지도 않은 평범한 아시아계 여자아이라는 이유로. 낯가림이 심하며 겁이 많은 사바나, 이야기 속 흑인 공주가 개구리 공주뿐이라는 사실을 울적하게 여기는 리즈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미희는 반드시 이 세계에서 꿈을 이뤄 세상의 고정 관념이 틀렸음을, 자기가 믿어 온 스스로가 옳음을 증명하려고 한다. 그래야 내가 생각하는 나와 남이 생각하는 나를 같게 만들 수 있을 테니까, 한국인도 미국인도 되지 못하는 붕 뜬 상태를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 내가 나로서 온전히 속할 수 있는 곳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
“동화 속에는 아름다운 장미만 있는 게 아니야. 가시투성이이기도 하다고.”
‘잠자는 숲속의 공주’ 성에 도착한 세 아이는 마법으로 케이크를 장식하거나 새들과 노래하거나 기절하는 법 등을 배우는 공주 훈련을 시작한다. 시녀장 버사가 경쟁을 통과한 단 한 사람만이 공주가 될 거라고 했지만, 미희는 공주의 꿈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 자신을 증명할 길은 여전히 공주가 되는 것뿐이다.
그런데 잠자는 숲속의 공주를 만나고 난 뒤, 미희의 단단한 믿음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이야기해 보니 공주는 성에 갇혀 사는 것을 거부할 권리는 물론, 후식으로 작은 컵케이크 하나도 요구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정해진 대로 때가 되면 무도회에 가고 물레에 찔려 100년간 잠들어 있다가 왕자의 입맞춤으로 깨어나기만을 기다려야만 하는 도구로서의 존재일 뿐이었다. 온전한 자신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공주를 꿈꿨던 건데 공주가 되면 또 다른 틀에 자신을 가두는 꼴이 될 거라니? 그 끝에 기다리는 게 성에 갇힌 삶, 다른 이들의 생각에 자신을 끼워 맞추는 삶, 무엇하나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는 삶이라니……! 그건 미희가 원하는 ‘오래오래 행복한 결말’이 아니었다.
미희는 공주의 꿈을 포기하고 원래 세계로 되돌아갈 방법을 찾으려 하지만 가시투성이 덩굴과 좀비, 음모가 뒤엉켜 바뀌기 시작한 이야기는 아이들을 위험으로 내몬다. 하지만 다친 친구를 치료할 약을 구해야 할 때도, 강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도, 좀비 떼에 둘러싸여 이젠 정말 끝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도 해결책은 모두 같은 곳에 있었다. 미희가 벗어나려고 했던 바로 그 어중간한 현실 속에 말이다. 잘하지는 못했지만 어떻게든 해냈던 일도, 그때는 괴짜 취급이나 당했던 모든 경험도, 쌓이고 쌓이면 결국 오늘의 나를 만드는 한 부분이 된다는 듯이.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 말끝에 기다리고 있는 것
‘우리는 모두 각자 인생의 주인공이다.’라는 말이 있다.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당연한 말이지만 때로는 내가 정말 주인공이 맞는지, 가끔은 남을 돋보이게 하는 엑스트라에 그치지 않는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행복한 순간만 잘라 전시되는 타인의 삶은 모든 게 그 사람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여서, 그래서 고민도 갈등도 없이 너무나도 행복하고 평온하게만 보이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돋보이길 바라면서도 자신이 속한 무리에서 튕겨 나갈 만큼 튀고 싶지는 않은 모순적인 마음이 유독 커다래지는, 그래서 친구들에게 받는 영향이 큰 어린 시절에는 더욱 그렇다.
미희는 부딪치고, 흔들리고, 알 수 없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며 집에 돌아오는 길을 찾아냈다. 그 과정에서 스스로에 대한 확신과 자기 자신을 소중히 생각하는 마음도 조금 자라났다. 미희가 헤맸던 동화 세계는 어쩌면 자신의 마음속이었고, 그렇기에 이제 막 스스로가 원하는 삶, 자기 자신을 고민하기 시작한 미희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총 4권으로 완성될 이후의 이야기에서 미희가 자신만의 세계를 어떻게 넓혀 갈지, 결말에서 자신만의 동화를 어떻게 완성해 낼지가 더욱 기대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