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자살할 거예요.” 당신이 속삭였다.
그러고는 등받이에 기대며 나를 살폈다.
내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모르지만, 당신이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닌 걸 알았다.
“어떻게 하려고요?” 내가 겨우 끄집어낸 말이다.
“말씀드릴까요?” 당신이 모호하고도 재미있어하는 미소를 지었다. 나는 이 물음에 대해 생각했다. 알고 싶나?
“사실 정확한 표현은 아니에요. 우선 자살하는 게 아니에요. 그건 이미 해봤어요. 저를 죽이는 건 제가 아니라, 그들이에요.”
“그들?”
“네. 제가 계약서에 서명을…….” 당신은 카르티에 손목시계를 보았다. 로버트라는 남자에게 받은 선물이겠지. 그가 바람피우기 전이었을까, 이후였을까? 이후다. 멜리사라는 여자가 처음도 아니었고 그는 처음부터 바람을 피웠을 것이다. “……했어요. 네 시간 전에.”
“그들이라면?” 내가 다시 물었다.
“자살 에이전시요.”
“그러니까…… 스위스처럼? 조력자살 같은 건가요?”
“네, 조력이 더 많이 필요하지만요. 다른 게 있다면 그들은 자살로 보이지 않게 죽여준다는 거예요.”
살인사건에는 이른바 80퍼센트 법칙이 있다. 살인사건의 80퍼센트에서 가해자가 희생자와 밀접한 관계이고, 그중에 80퍼센트에서 가해자가 남편이거나 남자친구이고, 살해 동기의 80퍼센트가 질투라는 법칙이다. 따라서 우리 강력반에 신고가 들어와 ‘살인’이라는 말이 들리는 순간 살해 동기가 질투일 가능성이 51퍼센트라는 뜻이다. 그래서 내가 약점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수사관으로 부상한 것이다.
내가 사람들에게서 질투를 읽어내는 법을 터득한 게 정확히 언제였는지 말할 수 있다. 모니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걸 안 순간이었다. 나는 극심하게 고통스러운 질투의 전 과정을 거쳤다. 처음에는 믿지 못하다가 절망에 빠졌다가 분노에 휩싸이고, 자기 비하에 사로잡혔다가 마지막에는 깊은 우울에 빠지며 고통스러운 질투의 과정을 거쳤다. 그전에 이렇게 고문에 가까운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어서였는지, 고통이 나를 집어삼키는 순간에도 마치 밖에서 나 자신을 바라보는 느낌이었다. 마취도 안 하고 수술대에 누운 환자인 동시에 첫 수업에서 수술대 옆 무리에 끼어 사람의 흉곽에서 심장을 꺼내는 과정을 참관하는 어린 의대생이 된 느낌이었다.
“넘겨짚지 마, 난 그냥 일을 이해하는 파트너가 필요했을 뿐이야. 안 그러면 내가 힘들어지니까, 알아들어?”
“알아. 아마 자네가 아는 것보다 더 많이. 누가 진심으로 도와주려 할 때는 알 수 있어. 자네도 지금 알잖아? 아니면 내가 그저 수거차 파트너 때문에 나까지 망하기 싫어서 이러는 걸로 보여?”
나는 고개를 저었다. 물론 피유스가 나를 돕는 걸 알았다. 그는 늘 그랬다. 내 뒤를 봐준 게 아까 발코니의 그 미친 늙은 여자 일이 처음은 아니었다. 나는 그냥 외국인이 와서 일자리만 뺏어갈 뿐 아니라 상사 자리까지 올라가는 게 짜증 났을 뿐이었다. 어쩐지 그러면 안 되는 것 같았다. 아무나 그냥 들어와서 정당하게 얻은 게 아닌 무언가를 차지하게 놔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가 권리를 가진 내 것을 말이다. 그러면 전쟁이 날 수밖에 없다. 그래, 그래,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되는 거 나도 안다. 그러면 곤란한 처지로 몰릴 수 있다는 것도 안다. 다 안다고. 엿이나 먹으라고 해.
바이러스가 처음 발견되어 팬데믹으로 번지고 세상의 모든 것이 소멸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사람들이 파리처럼 죽어나갔다. 처음에는 바이러스 탓이었지만, 이후에는 경제가 파탄 나고 사회와 정치 제도가 무너진 결과였다. 자연히 가난한 사람들이 팬데믹에 가장 크게 타격을 입었다. 나쁜 뉴스는 항상 그렇게 돌아간다. 그러다 식량 부족 사태가 발생하고 상황은 바뀌었다. 사회가 집단으로 함께 헤쳐나가야 할 상황에서 가진 자들과 가지지 못한 자 사이의 갈등으로 바뀌었다. 처음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들에게 맞섰다. 이어서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과 싸우더니 결국 가족과 친구를 제외하고 모두가 적이 되었다. 슈퍼마켓은 텅 비었고, 얼마 후 총포상도 비었다. 총과 라이플총 생산 공장은 맨 마지막까지 가동할 텐데도. 이미 무너져가던 법과 질서가 붕괴했다. 부자들은 농장과 시골 별장에서, 이왕이면 방어하기 수월한 높은 지대에서 사방의 벽 안으로 들어가 바리케이드를 쳤다.
“어떻게 된 거야?” 이렇게 묻고 나도 담배를 한 모금 빨았다. “시간 여행을 하는 법을 알아낸 거야?”
“십일 년 걸렸어.” 그가 말했다. “나랑 스위스의 소규모 연구팀이 함께 매달렸지. 시간을 여행하는 게 아니라 평행우주나 사건의 과정 사이를 여행하는 거야. 평행우주의 뒷문으로 슬쩍 들어가는 길을 발견하기는 했는데, 문제는 우리가 들어가고 싶은 우주를 어떻게 찾느냐는 거였어. 그런 우주가 무한하고 대다수는 차갑게 죽어 있거든. 하나의 우주에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어. 사건의 과정은 고정되어 있거든. 가령 원자 하나를 옮기면 새로운 우주가 생기는 거야.”
어느 저녁에 아돌프가 제 새끼에게 물려 죽은 호랑이뱀을 보여주며 자연의 섭리는 부모 자식을 모르고 언제 어디서나 먹고 먹히는 문제일 뿐이라고 말해주었다. 제 자식이나 제 부모를 잡아먹는 것은 악하거나 부도덕한 행위가 아니고, 오히려 자연의 명령에 순응하는 행위이자 아프리카에서 가장 중요한 의무, 곧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살아남는 의무에 충실한 것이라고 말했다. 시간이 흐르는 사이 에머슨 애벗도 자연히 이런 자연의 섭리를 받아들이고, 자연의 균형을 맞춰주고 동물과 인간에게 살아갈 권리를 주는 냉혹하고 무자비한 세상의 이치로 존중하게 되었다. 그리고 서서히 그동안 그가 무엇을 놓치고 살았는지 깨달았다. 그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 더 정확히 말하면 살아 있지 않은 상태의 공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