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 30년 역사와 치열한 논쟁이 반영된 ‘헌법 교과서’
박한철 전 헌법재판소장이 들려주는 시민을 위한 두 번째 헌법 수업
“헌법재판의 본질은 질문이다. 문제가 된 헌법적 쟁점과 헌법가치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을 통해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바로 헌법재판이기 때문이다. 계속 질문하다 보면 우리의 정치 현실과 미래에 대한 고민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결국 훌륭한 헌법재판이 되려면 다양한 의견과 가치가 조화롭게 어우러진 아름다운 교향악이 되어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개인과 사회, 국가 공동체가 미래를 향해 상생 발전하는 굳건한 토대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되는 까닭이다.”(《헌법은 국민을 어떻게 지키는가》, ‘저자의 말’ 중에서, 7쪽)
2025년 4월 4일 11시 22분 헌법재판소가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심판에서 전원일치로 인용결정을 내리면서 극단적으로 분열되어 있던 대한민국 사회는 사회통합을 위한 발걸음을 내딛었다. 이는 “분열된 정치와 사회를 헌법의 이름으로 다시 감싸안는 공동체 통합의 헌법적 절차”(56쪽)였다. 이처럼 헌법은 공동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며 국가의 주인인 국민의 삶을 지키고 권리를 실현한다.
헌정사 최초의 정당 해산 및 박근혜 대통령 탄핵부터 몇십 년의 시대변화를 반영한 간통죄 사건까지 우리 사회의 변곡점이 된 헌법재판에 관여하거나 직접 결정한 제5대 헌법재판소장 박한철 교수의 신간 《헌법은 어떻게 국민을 지키는가》가 출간되었다. 《헌법의 자리》(김영사 刊, 2022)에 이어 나온 두 번째 책으로 이번 신간은 박한철 교수의 제자로 한국은행에서 화폐, 금융, 중앙은행에 대한 법적·제도적 연구를 수행해온 신상준 박사가 공저자로 참여했다. 전작이 대한민국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13개의 헌법재판을 살펴 헌법의 의미를 밝혔다면, 신작은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부터, 일본군위안부 배상 문제, 대통령 윤석열 탄핵 사건까지 42개의 헌법재판을 통해 헌법이 어떻게 국민의 기본권을 보호하고 민주주의를 실현하는지 보여준다.
저자는 헌법재판의 쟁점과 판결 이후 사회변화를 살피고, 민주주의·자유주의·법치주의·공화주의 등 헌법의 핵심 원리와 가치가 어떻게 일상생활에 적용되는지 들려주며, 민주주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헌법의 비전을 제시한다. 최근 판례뿐 아니라 과거·참고 판례를 아우르며 헌법이 역사적 흐름 속에서 지키고자 한 핵심 가치와 만들어가고자 시대정신을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설명한다. 이 책은 시민을 위한 진정한 ‘헌법 교과서’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42개 헌법재판으로 살펴본 우리 헌법의 핵심 가치와 원칙
헌법은 어떻게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고 공동체를 지켜왔는가
· 민주공화국과 국민주권의 원리: 민주정치의 확립과 발전
헌법 제1조는 대한민국의 통치 형태와 국민주권의 원리를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다. 민주국가에서 다양성은 어떻게 가능한가? 국가가 정부 비판적인 문화예술인의 표현 행위를 통제할 수 있는가? 헌재는 정부에 비판적인 활동을 한 문화예술인이나 단체를 문화예술 지원 사업에서 배제한 국가행위가 전원일치로 위헌임을 확인했다(‘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작성 및 지원 사업 배제 사건’). 정치적 견해는 비록 공개된 정보라 할지라도 개인정보 자기결정권의 보호 범위에 속하기 때문에 정부의 정보 수집 행위는 법령상 근거가 없어 개인정보 자기결정권을 중대하게 침해한다. 또 특정 정치적 견해를 표현한 자를 차별하므로 정치적 표현의 자유와 평등권을 침해한다. 이 결정은 “국민의 대표자가 가져야 할 민주적 국정 운영 태도가 무엇인지에 대한 헌법적 기준을 제시”(92쪽)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 선포 행위는 왜 위헌인가? ‘대통령 윤석열 탄핵 사건’에서는 윤석열 대통령이 헌법 수호의 책무를 저버리고 민주공화국의 주권자인 대한국민의 신임을 중대하게 배반했으므로 대통령직에서 파면한다는 인용결정(전원일치, 8 대 0)을 내렸다. 헌재는 윤석열 대통령이 헌법과 〈계엄법〉이 정한 계엄 선포의 실체적·절차적 요건을 모두 어겼다고 판단했다. 헌정사상 두 번째 대통령 탄핵 인용결정은 “‘최고의 권력자라 하더라도 결코 법 위에 군림할 수 없다’고 선언한 것으로 법치주의와 헌법 우위의 원칙을 재확인했다.”(55쪽)
· 지고의 가치, 인간의 존엄성: 인권 존중의 보호와 강화
헌법 제10조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고의 가치로 선언하면서, 모든 국가권력에 기본적 인권의 불가침을 확인하고 이를 보호할 의무를 부과한다. 일본군위안부의 배상 청구는 국가가 책임져야 할 의무인가 외교 문제에 국한되는가? 헌재는 대한민국 정부가 일본군위안부 배상청구권과 관련해 일본과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조치를 취하지 않은 부작위가 위헌이라고 판단했다(‘일본군위안부의 대일 배상청구권 사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민주주의 법통을 이어받은 대한민국 정부로서 국가가 마땅히 떠맡아야 할 중대한 기본권 침해에 대해 그 책임 범위를 확인”(141쪽)한 결정이다.
국가의 기본권 보호 의무는 자국민에게만 적용되는가? 헌재는 국내에 체류하는 난민과 외국인의 기본권 주체성을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여러 결정을 통해 보편적 국제 인권의 향상에도 크게 기여했다. 예를 들어 외국인 산업연수생을 〈근로기준법〉이 보장하는 근로기준 중 주요 사항의 적용에서 배제하는 〈노동부 예규〉, 난민인정자를 코로나19 긴급재난지원 대상에서 제외하는 〈긴급재난지원금 처리기준〉이 평등권을 침해한다는 위헌결정을 내렸다.
· 지속 가능한 국가 공동체: 공동체의 안정과 번영 확보
국가 공동체의 안정성을 확보하는 일은 국가의 최고 의무인 국민의 기본권을 지키는 일과 직결된다. 기후위기와 관련해 국가가 취해야 할 최소한의 조치는 무엇인가? 헌재는 〈탄소중립기본법〉상 203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을 40퍼센트 감축한다는 규정에 대해 합헌결정을, 2031년부터 2049년까지 감축목표와 관련해 어떤 정량적 기준도 제시하지 않은 것에 대해 위헌결정을 내렸다(‘온실가스 감축목표 미제시 사건’). 이 사건에서 헌재는 기본권 침해와 관련해 일반적인 판단 기준인 ‘과잉금지 원칙’이 아닌 ‘과소보호금지 원칙’을 기준으로 삼아 국가가 기본권(이 사건에서는 환경권)을 보호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조치를 다했는지 여부로 위헌성을 판단했다.
우리 헌법이 근본적으로 금지하는 이미 완료된 사태에 대해 나중에 만든 법률을 적용하는 진정소급입법은 언제 가능한가? 헌재는 12·12 군사반란 및 5·18 광주민주화운동 무력 진압 관련자를 처벌하기 위한 〈5·18 특별법〉이 헌법에 위반되지 않는다는 합헌결정을 내려 공소시효가 완성된 범죄혐의 사실에 대해 소추가 가능하도록 예외적으로 허용했다(‘〈5·18 특별법〉 사건’). 이 사건의 관련자들은 우리 헌법질서의 근간을 이루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파괴하고 국민의 자유를 장기간 억압했기 때문에, 공소시효가 완성되었다 해도 이들을 처벌하는 일은 법적 지위에 대한 신뢰이익을 보호하는 것보다 그 공익적 필요가 매우 중대하다. 이는 “집권 과정에서 헌정질서를 파괴하는 범죄를 범한 자들을 응징하여 정의를 회복해 왜곡된 우리 헌정사의 흐름을 바로잡”고, “앞으로 우리 헌정사에 다시는 그와 같은 불행한 사태가 반복되지 않도록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헌정사적 이정표를 마련”(187쪽)한 결정이다.
어떻게 국민의 잃어버린 권리를 되찾고
민주주의의 위기를 극복할 것인가
헌법의 자리를 묻다
“민주주의는 그 자체로서 결코 완성된 정치체제가 아니다. 시대변화와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정치체제로서 지속적인 개선과 문제 해결이 필요하다. 21세기의 미래는 민주주의가 직면한 새로운 도전과 시련을 어떻게 극복해나갈지에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31~32쪽)
오늘날 우리는 민주주의 위기의 시대를 지나고 있다. 분열과 갈등이 고조되는 지금, 헌법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헌법재판소는 한국 사회의 첨예한 논쟁과 역사적 흐름 속에서 갈등을 중재하고 국민을 지켜왔다. 헌법은 어떻게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고 민주주의와 국민을 지킬 수 있는가?
고대 그리스의 직접민주주의에서부터 19세기 근대 입헌민주주의, 20세기 사회복지국가 민주주의, 21세기 대중민주주의에 이르기까지 민주주의는 다양한 형태로 발전해왔다. 21세기에 당면한 ‘민주주의의 위기’는 충분히 예상 가능하고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는 위험이지만, 그 심각성 때문에 오히려 사람들이 간과하거나 무시하는 ‘회색코뿔소Gray Rhino’의 문제다. 21세기의 시대정신은 회색코뿔소의 위험을 대비하고 그 결과를 바로잡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이를 위해 저자는 19세기 근대 입헌주의 헌법(자유와 인권) 및 20세기 사회복지국가 헌법(복지와 평등)에서 더 나아간 21세기 사회통합국가 헌법(인간 존엄과 공동 번영)의 실천을 강조한다. 국가 공동체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국민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헌법은 21세기의 시대정신을 반영해 사회통합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실현해나가야 한다. 이 책은 갈등과 혼란의 시대에 민주시민의 삶과 권리, 지속 가능한 국가 공동체를 실현하는 이정표가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