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
등대는 하나, 둘, 꺼지고, 하나, 둘, 꺼지는 리듬으로 불빛을 비추었다. 섬과 바다 위에서 고동치던 신호였다. 한편 만 너머 본토 항구의 빛은 붉었고, 그 붉은빛 너머에는 그곳이 도시임을 알리는 십만 개의 번쩍거리는 구멍들이 있었다. 도시는 시꺼먼 바다 위에서 아무 곳에도 이르지 못하고 끝없이 표류하고 표류하는 듯 보였다.
#영미문학
AN ISLAND 캐런 제닝스 저자 권경희 역자
  • 2024년 08월 12일
  • 268쪽131X204mm비채
  • 978-89-349-1087-9 03890
섬
AN ISLAND 저자 캐런 제닝스 2024.08.12
격동하는 역사, 바닥없는 상실감…
비범하고 웅장하며 매혹적이다. _부커상 심사위원단
2021 부커상 노미네이트 ★ 〈뉴욕타임스〉 에디터스 초이스
 
스스로를 작은 섬에 유폐한 남자가 있다. 일흔 살 새뮤얼은 등대지기이자 섬의 유일한 주민이다. 사람들은 그에게 외롭지 않으냐고 묻지만, 새뮤얼은 고립된 삶에 만족하며 살아왔다. 난민임이 분명한 한 남자가 표류해 오기 전까지는. 2021 부커상 후보작인 소설 《섬》은 이 가상의 섬에서 일어나는 나흘 동안의 사건을 그린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작가 캐런 제닝스는 새뮤얼의 고된 삶을 통해 식민지 시대 이후 아프리카의 정치적, 사회적 문제를 들여다보며 아름답고 절제된 언어로 묻는다. 폭력은 어떻게 또 다른 폭력을 낳는가. 자유는 어떻게 억압되는가. 연대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이방인은 얼마나 쉽게 배척되는가…. 어디에도 없는 섬에 사는 노인과 낯선 타인의 이야기가 어디에나 있는 우리의 이야기로 변화하는 순간, 작가가 획득한 리얼리티는 오늘의 안온함을 날카롭게 겨냥한다.
P.14
“다른 나라 난민들이 도망치다 물에 빠져 죽을 때마다 섬으로 갈 수는 없어요. 그건 우리 일이 아닙니다.”
“그럼 저 시신들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당신 좋을 대로 하세요. 난민 시신은 필요 없으니까.”
P.61
등대는 하나, 둘, 꺼지고, 하나, 둘, 꺼지는 리듬으로 불빛을 비추었다. 섬과 바다 위에서 고동치던 신호였다. 한편 만 너머 본토 항구의 빛은 붉었고, 그 붉은빛 너머에는 그곳이 도시임을 알리는 십만 개의 번쩍거리는 구멍들이 있었다. 도시는 시꺼먼 바다 위에서 아무 곳에도 이르지 못하고 끝없이 표류하고 표류하는 듯 보였다.
P.98-99
“사려주.” 남자가 말했다. “사려주, 사려주, 사려주.” 그 말이 “살려주세요”임을 새뮤얼이 부정할 수 없을 때까지 계속 말했다. 새뮤얼이 어딘가에서 들었던 그 문장, 어딘가에서 배웠던 그 말뜻, 그 소리가 지금 절박하게 되돌아오고 있었다. 남자의 애원에서, 그 단어를 사용하는 간절함에서 새뮤얼은 자신의 공포를 인식하고 있었다. 긴긴 세월 몸에 지니고 다녔던 공포. 교도소에서, 그리고 그 이전에도, 그리고 석방된 후에도 여전히 계속되던 그 공포. 그가 죽고 말리라는 그 공포. 
P.146-147
새뮤얼은 순간 말을 잃었다. 그는 잠들어 있는 죄수들을 둘러보았다. “내가 그 긴 세월을 보내고 무엇을 알게 되었는지 말해볼까요?”
“말해봐.”
“나는 내 자식이 어떻게 생겼는지 전혀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내 마음속에서 내 아들은 아직 아기입니다. 내가 광장 가두시위에 나가던 그날 아침 마지막으로 보았던, 내 어머니 품에 안긴 그 모습 그대로 작은 갓난아기입니다. 나에게 바깥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으며, 모든 것은 그 아기를 중심으로 그대로 서 있습니다. 내 여동생은 십 대이고, 내 아이의 어미는 여전히 석상 위에서 시위하고 있으며, 양친 모두 살아 계십니다. 내게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이곳에서 나는 시간이 흘렀다는 사실조차 잊습니다. 가끔 창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도 난 나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저 남자는 대체 누구인가? 묻고 싶다고요.”
“그런 의문은 품지 말아야 해. 내가 말했듯 거울 속 그 남자는 스스로 충성심을 보여준 남자야.”
새뮤얼은 고개를 돌려 다시 교도관을 쳐다보았다. “그런 말 마십시오. 나는 나 자신 말고 누구에게도 충성한 적이 없습니다.”
P.219
섬, 등대, 오두막, 돌담과 채소. 이것들이 남자의 손에 넘어가 남자의 지배를 받게 두고 떠날 수 있을까. 아무도 뽑지 않은 질식초가 날로 무성해지겠지. 건물들과 텃밭과 땅을 뒤덮겠지. 돌담이 파도에 무너지면서 섬의 모양을 새롭게 그려가다가 하나씩 하나씩 파도에 실려 결국 흔적도 없이 사라지겠지. 
새뮤얼은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내버려둘 수 없다. 그는 자신의 땅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떠나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땅은, 언제나처럼, 그의 것이다.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
넷째 날

감사의 말
작가이미지
저자 캐런 제닝스
1982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에서 태어났다. 케이프타운 대학교에서 영문학 및 문예창작 석사 학위를, 콰줄루나탈 대학교에서 문예창작 박사 학위를 받았다. 요하네스버그 대학교에서 역사학 박사 과정을 밟았으며, 브라질 고이아스 연방대학교에서 과학과 문학의 역사적 관계 연구를 수행했다. 2013년 에티살랏 아프리카 소설상 후보에 오른 첫 소설 《수벡을 찾아서Finding Soutbek》를 발표하며 작가로 데뷔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소설 《뒤집힌 지구Upturned Earth》와 시집 《메아리로 살아가는 공간Space Inhabited by Echoes》, 에세이 《아버지와의 여행Travels with my father》 등이 있다.

《섬》은 제닝스의 세 번째 장편소설이다. 영국에서는 일찍이 이름을 알리고 마일스 몰런드 재단의 지원도 받았으나 정작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작가의 이름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역사의 상흔을 직접적으로 다루었기에 선뜻 출간하겠다고 나서는 출판사가 없었다. 케이프타운의 신생 출판사 ‘캐러밴’이 계약에 나선 끝에 2021년 젊은 남아프리카공화국 작가에게 수여하는 셀로 뒤커상을 수상하며 자국에서 주목받고 싶다는 작가의 오랜 희망도 실현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부커상 후보에 오르면서 전세계의 주목을 받으며 화제가 되었다.
날카로운 역사 인식과 이방인을 향한 섬세한 사유
국제적 주목을 받은 캐런 제닝스의 화제작 국내 첫 출간
작가 캐런 제닝스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에서 태어나 케이프타운 대학에서 영문학과 문예창작을, 요하네스버그 대학원에서는 역사학을 공부했다. 이후 브라질로 이주하여 과학과 문학의 역사적 관계를 연구했다. 《섬》은 식민주의와 그 상흔을 다룬 작품들을 발표해 국제적인 주목을 받고 있는 제닝스의 세 번째 장편소설로, 브라질에서 집필되었다. 코로나19 감염자가 급증하고 팬데믹이 선언되며 도시가 봉쇄된 브라질에서 외국인인 제닝스는 완전히 고립될 수밖에 없었다. 외딴섬에서 홀로 살아가는 새뮤얼만큼이나 지독한 외로움 속에서 글을 썼다고 작가는 회상한다.
 
첫 소설 《수벡을 찾아서》로 영국 등지에서 일찍이 이름을 알린 캐런 제닝스는 정작 모국인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못했다. 역사의 질곡을 적극적으로 다룬 《섬》 역시 남아프리카공화국판 출간은 요원해 보였지만, 신생 출판사 ‘캐러벤’이 이 책을 내겠다고 나섰다. 출간 이후 《섬》이 2021년 부커상 후보작으로 오르면서 자국에서 주목받고 싶다는 작가의 오랜 희망도 마침내 실현되었다. 모국의 역사를 파헤치는 날카로운 역사 인식과 이방인을 향한 섬세한 사유가 결속되는 본작은 제닝스 자신의 발자취와도 맞닿아 있다. 명료한 문체로 전개되는 서늘한 서사가 비애롭고도 아름답다는 감상으로 이어지는 까닭은 작가의 한계 없는 주체적 사유에서 비롯되었으리라.
 
“우리는 빼앗김이 무엇인지 압니다.
그런 우리가 어떻게 다른 이들에게 똑같은 일을 할 수 있는 걸까요?” _캐런 제닝스
 
고요하고 검은 바다 위, 등대에서 뻗어 나온 빛줄기는
어느 곳에도 이르지 못한 채 끝없이 표류하고, 표류했다
소설은 일흔 살 노인 새뮤얼의 고독한 아침으로 시작된다. 새뮤얼은 작은 섬의 등대지기이자 유일한 주민이다. 2주에 한 번 오는 보급선이 세상과의 유일한 접점이고, 섬은 온전히 새뮤얼의 것이었다. 난민임이 분명한 그 남자가 표류해 오기 전까지는. 새뮤얼의 나라는 식민지 시대, 부패정권, 군부독재로 이어지는 아픈 역사를 지녔다. 어린 시절 새뮤얼은 나라가 식민지가 되면서 대대로 살아온 땅에서 가족과 함께 쫓겨났다. 도시에서는 구걸로 생계를 연명했고, 독립운동하던 아버지는 장애를 갖게 됐다. 그러나 그토록 바라던 독립을 쟁취한 후에도 좋은 시절은 오지 않았다. 부패한 권력자들이 정권을 잡은 데다 정세가 불안정한 이웃 나라의 난민까지 몰려든 것. 군부는 그 틈을 교묘히 파고들고, 젊은 혈기에 취한 새뮤얼은 외국인들을 몰아내는 소요에 가담하지만 곧 수치심을 느낀다. 쿠데타가 일어나고 군부독재가 시작되자 새뮤얼은 동지들과 연대해 민주화 운동에 나선다. 그러나 그는 용감한 투사도, 권력의 개도 되지 못한 채 체포되어 23년 동안 감옥살이를 한다. 마침내 독재자가 실각하고, 자유의 몸이 된 새뮤얼은 등대지기에 자원한다. 섬은 외로운 곳이고 바다는 사나웠지만 그의 삶보다 거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낯선 타인과 맞이한 아침, 고립과 평화가 동시에 깨진다. 그는 남자와 공존할 수 있을까.
 
한 사람이 ‘섬’이 되기까지
되풀이되는 폭력과 야만의 역사
난민: 당신은 나와 다르다
《섬》은 남자가 표류해 온 날 아침부터 나흘 동안의 궤적을 담는다. 홀로 외로이 지키던 섬에 등장한 낯선 남자는 새뮤얼로 하여금 과거를 회상하게 만들고, 새뮤얼은 낯선 남자를 먹이고 보살펴주며 자신 안에 있는 줄도 몰랐던 친절을 발견한다. 생김새가 다른 데다 말도 통하지 않는 두 사람 사이에 약간의 온기가 움트는 듯했다. 이튿날 보급품을 싣고 온 선원들은 난민을 잔뜩 싣고 오던 배가 침몰했다며 바다로 가라앉는 배와 속절없이 죽어가는 사람들을 찍은 동영상을 보여준다. 문득 새뮤얼의 마음속에 의심이 싹튼다. 통성명조차 할 수 없는 이 소통 불가의 남자를 정말 여기에 두어도 괜찮을까. 만약 그가 나이 든 나를 죽이고 이 섬을 차지하려 든다면, 그땐 어떻게 해야 할까?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폭력성이 새뮤얼의 마음을 서서히 잠식한다.
 
섬: 이 땅은 나의 것이다
《섬》의 원제는 ‘The Island’가 아니라 ‘An Island’이다. 캐런 제닝스는 제목을 통해 이 ‘섬’이 가상의 공간임을 시사한다. 처음에는 마치 우화처럼 읽히던 소설은 새뮤얼의 개인사가 드러나면서 점점 강렬한 리얼리티를 얻는다. 어디에도 없던 가상의 섬이 어디에나 있는 땅으로, 이야기로 탈바꿈하는 지점이다. 새뮤얼은 특히 땅에 집착한다. 잡초를 뽑고 채소를 심고 땅을 길들이려 한다. 섬은 이미 바다로 둘러싸여 있건만, 에두르는 돌담까지 쌓아 세상을 차단한다. 가끔 해안에 떠밀려온 시신을 돌담 아래에 묻어주기도 한다. ‘이 땅은 나의 것이다.’ 이민자 추방을 외치며 폭력을 휘두를 때도, 독재자를 끌어내리자며 가두시위에 나설 때도, 그의 마음속에는 항상 땅이 있었다. 그러나 낯선 이방인이 표류해 오며 그는 섬을 온전히 소유할 수 없게 된다. 누군가와 나눠 갖기에 그의 땅은 너무나 빈곤하다.
 
역사: 삶은 곧 치욕이었다
식민 지배와 빼앗긴 땅, 독립 후 맞이한 부패한 정권, 이어진 쿠데타와 폭력적인 군부독재… 새뮤얼 세대는 부모의 독립운동을 실패로 여겼고, 보통 사람들의 삶은 정치적 상황과 무관하게 늘 극심한 빈곤 속에 있었다. 새뮤얼은 고향에서 쫓겨난 분노로 이민자를 소탕하는 소요에 가담했던 치기 어린 시절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정의의 편에 서서 민주화 운동가가 되고자 했다. 그러나 이후 이어진 긴 감옥살이는 그의 젊음과 꿈, 희망을 남김없이 앗아갔다. 출소 후 선택한 등대지기로서의 삶은 그에게 처음으로 주어진 평온함이며, 치욕스럽게 살아온 과거에서 벗어날 기회였다. 그의 굴곡진 생애는 남아프리카공화국 및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의 비극적인 역사와 연결된다. 비단 아프리카뿐만 아니라 아시아와 남아메리카 등 식민 지배를 겪은 국가들 대부분이 비슷한 상처를 갖고 있으며, 일부는 현재 진행형이다.
 
해외 서평
실패에 얽매인 새뮤얼의 삶을, 아름답고 절제된 그 질감을 요약해 전할 수 없어 안타깝다. 새뮤얼의 모든 순간이 떨리는 손처럼 생생하다.
〈뉴욕타임스〉
 
새뮤얼과 낯선 타인의 위태로운 긴장감으로 마지막 페이지까지 격렬하게 몰아붙이는 소설.
〈커커스리뷰〉
 
얇지만 매우 강렬한 책. 단 4일에 걸친 짧은 이야기 속에 아프리카 격동의 역사와 한 남자의 비참한 삶을 압축해냈으며, 부드러운 문체로 타협 없는 정치적 비평을 쏟아낸다.
〈가디언〉
 
고통스러운 과거와 불안한 현재를 직조해 삶의 아픈 진리를 포착하다.
〈북리스트〉
 
올해 만난 최고의 책!
〈벌처〉
 
잔혹한 과거와 상실된 인간성이 인간의 연민을 독살하는, 그 과정을 심층적으로 담은 소설.
〈스타트리뷴〉
 
《섬》은 그야말로 계시처럼 읽힌다. 결국 우리는 역사에 대해 어떤 책임이 있는가. 매혹적인 소설이자 오래 품어온 우리 자신의 비밀들이 열리는 이야기.
폴 윤(소설가)